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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추억의 "공주시 서울 사무소"...

기사입력 2020.07.06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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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사무소 개소는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 종로1가에 공주시청이 하나 더 있는 것”이라고 지금부터 12년전 공주시 최초의 서울사무소 개소식에서 이준원 공주시장이 한 인사말이다.

 2008년 8월 7일,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 대성스카이렉스 502호에서 이준원 공주시장, 심대평, 정진석, 김상희 국회의원, 윤석금 웅진그룹회장 등 100여명의 각계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공주시청 서울사무소” 개소식을 가졌다.
 
공주시 서울사무소장 오명규.jpg

이날 공주시 서울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한 심대평, 정진석, 김상희 국회의원은 “공주시의 서울사무소 개소를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앞으로 당을 초월, 합심해 공주시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또, 이준원 시장은 “공주시가 역점시책으로 추진하는 5도2촌 주말도시, 사이버공주시민 100만명 모집등과 함께 공주의 특산품을 널리 알리고, 수도권 기업체의 투자유치 홍보활동을 통해 ‘힘찬 도전! 위대한 공주건설’을 건설하는데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 하겠다” 고 밝혔다.
 
웅진그룹 윤석금 회장은 인사말에서 “앞으로 공주시가 역점시책으로 추진 중인 사이버 공주 시민제에 그룹차원에서 전 직원의 가입을 권유 하겠다”고 말했다.
 
(주)진로 윤종웅 사장은 10월에 개최되는 제54회 백제문화제의 후원금으로 4억원을 기증할 것을 약속했다.
 
공주시 서울사무소는
40.45㎡ 규모의 복층으로 아담하게 꾸며진 사무소로 공주지역 특산물 전시공간과 재경향우회(회장 윤석금 웅진그룹회장, 사무총장 이용주) 등 출향인사들의 네트워크를 위한 사랑방 공간으로 마련되고 운영하였다.
 
이날, 개소한 서울사무소(초대 소장 오명규)의 주요 임무는 “중앙부처와의 지속적인 협력, 출향인사의 네트워크 구성, 5도 2촌 주말도시 홍보 및 수도권 기업체 투자유치 홍보활동 등 중앙과의 가교·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하는 임무였다.
 
공주시 서울사무소 개소식.jpg
 
초대 서울사무소장으로 명을 받은 필자는 공주시정의 홍보의 전진기지로 첫발걸음을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시작했다. 충남도에서는 아산시, 논산시, 보령시 다음의 네 번째로 서울 시대를 연 것이었다.
 
서울사무소의 기본운영 방향은 “인적네트워크 활동을 통한 위대한 공주 건설”이었다.
 
지금도 지방자립도는 열악한 상태지만 그 당시 역시 20% 정도여서 무엇보다도 국비의 확보가 중요한 임무였다.
 
시(市)의 현안사업에 대해 각 정부부처 담당자를 방문하여 공주시의 입장을 전달하고 추진상황을 수시로 체크한다. 지역 국회의원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지역현안사업들이 잘 해결되도록 하는 서포터 역할이었다.
 
 또한, 출향인사와 향우회 중심의 애향 공주네트워크 조성활동이었다. 5도2촌(5일은 도시, 2일은 공주)주말도시 공주건설을 위한 전사적인 홍보특파원 활동과 함께 지역축제 및 특산품 판매홍보 및 지원활동등도 전사적으로 전개했다.
 
공주시의 시(市)브랜드는 하이터지 공주(Hi-Touch Gong ju)이며 농특산물 브랜드는 “고맛나루” 였다.
 
공주시의 브랜드 “하이터치”는 ‘모든 사람과 정답게 네트워킹 한다’는 데 중점을 둔 것이며, 농특산물 브랜드 ‘고맛나루’는 공주을 상징하는 곰나루(옛 고마나루)와 농산물 고(高)맛의 합성어이다.
 
당시 공주시 인구는 13만명이었다. 인구 감소의 대안으로 ‘사이버 공주시민제도’를 역점시책으로 추진하던 때였다. 사이버시민 30만명을 목표로 출향인을 대상으로 사이버상 공주시민 주소 갖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지치고 힘들기도 했다. 나의 임기는 없었다. 아득한 안개 속에서 복귀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도 아녔다. 그럴 때 마다 조계사 둘레 길을 돌거나 청계천을 따라 걸었다. 어떤 때는 서울시청 광장 길을 따라 서울 역까지 마냥 걸었다.
 
초대 서울소장이라는 보직(補職)에 대한 나의 책임감은 나를 더욱 더 짓누르곤 하였다. ‘참고, 또 참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가장 나를 괴롭히는 건 외로움 이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견디고 견디며 나를 보듬으며 그렇게...’ 그러면서도 업무추진에 더욱 매진했었다.
 
결국, 많은 출향인사 덕분에 과장(사무관)에 승진 임용되고 경저리(옛 서울의 지방관리) 서울소장의 임무는 종료되었다.
 
초대 소장으로써의 “주춧돌을 놓는 역할을 일응, 성공적으로 수행 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지금, 한편 생각해 보면 참 바보스럽게 열정적이었다. 그런 열정과 역경의 극복이 보람과 경력이 되고 추억 속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뚜렷이 기억에 남고 보람된 일, 추억 몇 가지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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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하나는 많은 재경출향인사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삶을 이해 할 수 있었던 계기는 나의 성장의 자산이 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종로, 서울의 인사동거리의 낭만을 나름 느끼고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사동 ‘쌈지길’에서 생명과학고 이근우 회장님과 인생 선배 분들과 함께한 한 여름날 오수의 “아이스 크림과 함께한 즐거운 추억”은 지금도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젊은 날 새로운 일에 겁 없이 도전하고 물론 많은 생각과 고민과 시련도 겪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잘 선택한 일이다.
 
서울 시절 청계천 길을 따라 쭉 동대문까지 하염없이 걸어 본적도 있었다. 서울사무소장의 직은 외롭지만 젊음이 있어 도전적이고 결단코 후회는 없었다. 내생의 아주 특별한 날들 “행복한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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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토요일이다. 지인이 찾아왔다. 옥룡동 대추골입구에 위치한 콩국수 잘하는 집에서 맛있는 한끼식사를 했다. 한여름의 보양식으로 제격이다. 콩국물도 한병 13천원 주고 공주페이로 구매했다.
 
그리고는 백제시대의 공주도 걸었을.. 효자 이복의 길을 따라 제민천길로 향했다. 1급수가 된 듯하다. 물고기들도 마냥 신이 났는지 이리 저리 원을 그리며 수영하고 춤을 춘다.

서울의 아름다운 청계천 길은 아니지만 백성을 편안하게 구제한다는 나의 고향 공주의 제민천길. 대통교 다리 밑 길을 따라 함께 한참을 걸었다.
 
문득, 주마등처럼 스치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지난 서울사무소장 시절 행정민안(行政民安)을 고민하던 그때를 떠올리면서 추억의 길을 걷고 있었다.
 
 아직도 그때의 일들이 어제의 일인 듯 선명하고 가슴 뭉클하게 떠오른다.
 
오늘은 더욱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KakaoTalk_20200705_19181866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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