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정안(正安)어르신 두분과 함께한 정겨운 시골 맛 집 “늘 푸른솔”... > 뉴스 | 충청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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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정안(正安)어르신 두분과 함께한 정겨운 시골 맛 집 “늘 푸른솔”...

기사입력 2020.07.0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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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밤.jpg
 하늘아래 제일 편안한 곳이 천안(天安)이라면 밤 생산지로 유명한 “정안(正安)은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이라 일응 칭(稱) 한다. 지금부터 42년 전 필자는 정안면에서 서기보 시보의 공직 생활을 시작하던 때였다.
 
고등학교 3학년를 막 졸업하기 전 1977년 당시 5급 공무원(현, 9급)에 합격하고 그해 가을 대전 괴정동의 산기슭에 위치한 충남 지방공무원 교육원에서 신규임용후보자반 교육에 입교 했다.
 
일조(一朝), 일석점호(一夕點呼)와 황색운동화를 신고 새벽아침을 알리는 국기계양식과 새마을 노래를 제창하고 하나 둘 교관의 구령에 따라 외치면서 구보(驅步)를 하였다. 그렇게 6주간의 공직임용후보자반 교육을 마쳤고 그해 12월 31일 공주군 탄천면으로 첫 발령을 받아 떠났다.
 
고등학교 졸업 전이라 교복을 입은 채로 첫 근무지로 향했다. 면장님께 신고를 하고 바로 투입된 일은 산업계의 주 임무인 국도변 가로수의 잠복수 설치 작업 보조이었다.
 
잠복수 설치는 도로변의 가로수에 볏짚 가마니를 크기에 맞게 적당히 잘라 나무 둘레 중간 부분을 싸매두는 일이다. 이는 병해충들의 월동을 그 속에서 나도록 유인하고 이듬해 거적을 거둬 내어 소각하는 것으로 그 당시에는 병해충을 효율적으로 방제 및 예방하는 작업인 것이다.
 
예산이 부족한 관계로 직접 노동에 동원(?)되었고 1978년 1월 중순까지 몇날 며칠을 그 일에 투입되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던 중 그해 8월 탄천면이 고향인 정안면에 근무하던 선배가 1년도 근무하지 못한 군 입대가 예정되어 있는 필자를 밀어내고(?)오는 바람에 정안면과 인연이 시작된다.
 
이곳 정안은 평정부락을 비롯한 북계, 전평, 고성, 쌍달리 등 오늘의 필자를 있게 한 고(故) 임삼돌 할머니께서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외아들과 7남매의 손자녀의 부양을 위해 홀로 행상을 하시던 추억 어린 곳 이었다.
 
할머니는 공주 산성시장의 “공주유기점포”에 적을 두고 놋그릇을 스텐 그릇으로 교환하면서 때론 값 대신 고사리 등 산나물을 받아 공주읍내의 따로 국밥집으로 유명했던 중동의 “이학식당”에 납품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셨다. 정안은 할머니가 가장으로서 젊음을 보낸 고통스러우면서도 훗날 아름다운 추억이 서려있는 고장이다.
 
그런 인연 속에 정안면과 나의 첫 공직인연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공군 군복무기간 3년을 포함하여 1989년까지 만 11년을 내리 정안면 한 곳에서만 근무했다.
 
1988년 영자신문을 보시는 등 해박하시고 청렴결백하신 청백리 이종현 군수님과 이병하 부군수께서 공주군에 부임하셨다. 그동안 아름아름 상급기관인 군청직원을 뽑아 쓰던 마주왕(술이름)의 인사 관행에 쐐기를 박는 인사혁신을 단행하셨다.
 
1989년 이종현 군수님과 이병하 부군수님의 결단에 의해 첫 읍면동 7급 직원의 공주군청 전입시험제도가 실시되었다. 운도 따랐다.
 
 첫 번째인 제1기 공주군청 전입시험에 2명이 선발되는 데 그 중 하나에 포함되는 영광을 얻었다. 한분은 민방위과로 필자는 문화공보실 공보계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고(故) 이종갑 서울 신문지국장님, 대전일보 유재억, 중도일보 임재권, KBS 정기웅, 대전 MBC 서영석, 연합통신 임병고 기자님 등 언론사 기자 분들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런 후 공주시 초대 서울사무소장, 보건위생과장, 충남도청 장애인과 장애인 자립팀장, 충남공무원교수단 교수, 연구1팀장, 자료팀장, 공주시 문화재과장, 정안면장을 거쳐
 
공주시립도서관장, 그리고 공주시 보건소장 직무대리, 보건과장을 끝으로 2019년 12월 31일 만60세의 정년을 맞아 만42년(1977.12.31.-2019.12.31.)의 지방의 목민관에서 해관(解官)을 하였다.
 
그리고는 충청TV(김영록 대표)와의 인연으로 인터넷 언론사의 편집국장 겸 기자로 언론봉사 인생2모작을 시작하고 있다.
 
다시, 정안면 근무 그때로 돌아가 보자.
 
 그렇게 전입시험을 거쳐 군청으로 전입되어 정안면을 떠난 지 26년만의 귀향, 지난 2014년 1월 1일 다시 정안 면장으로 부임하였다.
 
 제일 반가운 건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 해왔던 이름이 같은 고(故) 최명규 선배다. 7-80년대 동거 동락하면서 같이 근무한 동료이자 선배로써 재무계에 오랫동안 인연 맺은 인생의 멘토였다.
 
80년대 재해 태풍, 노풍 피해 조사며 처음 시작하는 비닐 하우스 면적조사의 추억이 서려있다.
 
참외 수박 등 특용작물 재배농가에 을류 농지세 부과를 위한 조사 등의 임무에 동원되어 세원포착과 재해 감면 등 열정을 쏟아 붓고 업무에 열심이었다.
 
 필요경비를 제외한 소득금액의 20%의 세율인, 지금 생각하면 악법인 것을...그 때 열심히 충성한 덕(?)에 처음으로 충남도지사 표창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씁쓸하기도 하다.
 
아무튼 그 시절은 그랬다. 20대의 젊은 날, 대부분은 그 선배와 함께 비포장도로 국도를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자갈에 걸려 넘어지며... 노변을 중심으로 보여 주기 식 전시행정에도 동원되었다.
 
주로 논의 잡초 피사리 독려와 가을추수가 끝나면 바로 땅 심을 돋우는 생고(笙鼓)시용(柴用)의 생 볏짚을 논에 깔고 경운기를 동원하여 갈아엎어 주어 이듬해 땅 힘, 즉 지력(地力)을 증진시켜 벼 생산량을 높이는 일에 열심이었다.
 
어느 땐 마을 리장 댁에서 하루 밤 머물면서 새벽녘 동틀 무렵부터 일찍 일어나 깨우고 퇴비증산시책에 총 동원하였었다.
 
 우린 이를 두고 “생고시용”이 아닌 “생고생”하러 간다고 표현했다. 그런 덕분에 우리의 보릿고개, 식량문제는 해결되고 지금은 어느 정도 선진국, 부자나라가 된 셈이다.
 
그리곤 지친 몸을 이끌고 도로변 주막집에서 돼지등뼈를 속박아 놓은 콩비지를 안주삼아 일행과 함께 정겹게 막걸리 한 잔씩을 나누었다.
 
그렇게 한잔 두잔 계속되는 일상 속에 취해 가기도 하고 비틀거리며 10여년의 젊은 청춘을 불살랐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오늘 그 때 만났던 추억의 어르신 두 분을 만났다. 1936년 병자(丙子)생 그리고 한분은 세 살 아래 당시 4급 공무원 주사 출신 행정사(전, 행정대서)어른이시다.
 
코로나 19의 생활 속 거리두기 실천 속에 집안에 거의 칩거 중이시다. 가슴 답답하여 푸른 들판경치도 구경하고 싶고 바람도 씌고 싶어 하신다. 한동안 거동이 불편하니 어쩔 수 없이 집안 근처에서만 지내신 모양이다. 나를 보더니 대뜸 “오 면장 같이 밥 먹으로 가지!”하신다.
 
몸동작의 움직임이 딱 봐도 많이 불편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3년 전에 수술을 하고 지금도 약을 복용하며 회복 중에 있다고 하신다. 그 두 분 어르신과 함께 좋아하고 즐겨하신다는 “순두부”잘하는 맛 집으로 향했다. 정안.jpg
유근창 초대 재경향우회장님의 공덕비가 세워진 광정, 성춘향과 이도령이 만나 애절한 사랑과 커피(?)를 마시던 춘향각의 옆 도로를 따라가다가 구순 가까운 “장한 어버이 상”을 수상 하신 서울의 친구 어머니가 사시는 대산리와 100년이 넘는 밤나무(밤신?)가 살아있는 월산리 소랭이골 도로를 지나 문천리 허수아비마을 도로를 달리니 사곡면 유룡리 마을에 다다랐다.
     
시골 정겨운 맛 집 “늘 푸른솔”이다. 한쪽 방에선 전에 아는 공주시정을 논했던 지인인 전 시의원 한분이 일행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나태주시.jpg
그 곳에는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이 아름답게 벽을 장식하고 있고 정안면의 소재지 위치, 지도가 화가가 그린 듯 소담하게 자리하고 있어 더욱 정겨웠다.
양해를 구하고 한 컷 추억의 사진 속에 담았다.정안면지도.jpg
 이어, 맛깔스런 음식이 나왔다. 비주얼에서 일단 합격이다. 맛을 보니 일품정식이다. 여사장님의 구수하면서 친절한 미소가 산천의 아름다움만큼이나 더욱 아름답다. 가격 또한 1인 9000원 대만족이다.
 
오늘은 인생에서 영원히 기억에 남을 가장 젊은 날. 두 분의 행복과 우정(!)을 위해 사진도 한 컷 찍고 서로 휴대폰 사진으로 전송, 저장해 교환도 하고 확인하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두 분의 인생 선배 어르신도 신체적인의 고통과 불편함, 외로움도 잠시 잊은 듯 마냥 행복해 하시니 기쁘다.
 
필자도 오늘은 덩달아 나름 행복이다.
 
모처럼 그리운 할머니의 추억을 만나고 부모님 같은 어르신 두 분을 만나 효(孝)를 행한 느낌으로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두 분 어르신의 건강과 행복을 신께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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