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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 출신 시인 오탁번 선생 별세

기사입력 2023.02.16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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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금기였던 월북 시인 정지용의 시로 석사 논문을 써 주목받은 지천(芝川) 오탁번 선생이 별세했다. 8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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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한국시인협회는 고려대 명예교수이자 국문학자인 오 시인이 지난 14일 밤 9시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고인은 1943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고려대 영문학과와 동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66년 동화 ‘철이와 아버지’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집필 활동을 시작했다.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가,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처형의 땅’이 당선되며 ‘신춘문예 3관왕’을 기록했다.육군 중위로 입대한 그는 1974년까지 육사 국어과 교관을 지냈으며 1974~1978년 수도여자사범대학 국어과 조교수를 거쳐 1978년부터 모교인 고려대 국어교육과에서 후학을 길렀다. 고인은 시인으로 가장 유명하지만 시뿐만 아니라 소설, 평론을 오가며 다량의 문학 작품을 발표했다. 1980년대 말까지는 소설에 주력하며 다수의 중·단편을 썼다.고인은 1998년 시 전문 계간 ‘시안’을 창간했다. 2008∼2010년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고, 2020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었다. 한국문학작가상(1987), 동서문학상(1994), 정지용문학상(1997), 한국시인협회상(2003), 김삿갓 문학상(2010), 은관문화훈장(2010), 고산문학상 시부문 대상(2011)을 받았다.빈소는 고려대안암병원 장례식장 303호 특실에 마련됐고, 발인은 17일 오전 10시, 장지는 제천 개나리 추모공원이다.엄태석 문화기획자가 '푸른제천' 2021년 8월호에 인터뷰한 내용을 게재한다.《운명의 공간 애련리에서 만난 시인 오탁번》“나 돌아갈래”애련리는 마을이 마치 연꽃이 물위에 떠있는 형국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장금리, 길현리, 대티리를 병합해 애련리라고 불렀다. 장금리는 악성 우륵이 제자 셋(계고, 법지, 만덕)을 데리고 와서 춤과 노래, 가야금을 탔다는 장금대, 장금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박달재를 지나 원월리를 거쳐 애련리로 접어들면 원서천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영화 박하사탕의 배경이 된 진소마을에 닿기 전 300년 된 느티나무 아래 옛 백운초등학교 애련분교를 고쳐 지은 원서문학관을 만난다. 2003년 오탁번 시인이 고려대 교수직을 내려놓고 47년 만에 다시 고향에 돌아와 자리를 잡은 곳이다.가난했던 그에게 문학은 구원이었고, 어머니는 신앙이었다.일제 때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자부심으로 버텼던 아버지는 시인이 세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서른에 오탁번을 낳고 서른셋에 홀로된 어머니는 가난 속에서도 4남 1녀를 반듯이 키우셨다. 박달재 옛길을 따라 진달래 꽃을 따먹으며 허기를 달래던 시절 진학은 엄두도 못내던 형편이었다.'진달래는 먹는 꽃 먹을수록 배고픈 꽃’“정말 나의 문학의 근원은 어머니의 헐벗은 품속, 이미 나를 낳을 때는 젖이 말라붙어서 미음으로 나를 키운, 서른 세 살에 홀로 되신 어머니의 운명 속에 있다.” (‘작가수업 오탁번’ 중)가난하지만 영특했던 오탁번을 끔직히 아꼈던 권영희 선생님은 원주의 오빠에게 부탁해 숙식을 해결해주고 중학교 입학금도 내 주었다.‘선생님이 이젠 누나다 / 영희누나가 있으면 배고프지 않았다./ 울지도 않고 숙제도 잘했다.’(시 ‘영희누나’ 중)지독했던 가난과 외로움을 벗어나려 문학에 매달렸다. 문학만이 유일한 구원이었다. 고교시절에 학원문학상을 받았고 고려대학교에 진학해서는 동화, 시, 소설로 신춘문예 3관왕을 휩쓸었다. 66년 동아일보에 동화, 67년 중앙일보에 시, 69년 대한일보에 소설이 당선되었다. 그 해 ‘신춘문예 삼종삼연패’로 그의 등단 기사가 크게 실렸다.지금 생각해도 혈기방장하고 패기만만했던 젊음이었다.명예는 멍에다.그는 지난해 대한민국예술회 회원이 되었다. 현저한 예술적 성취와 공헌이 큰 이들에게 주는 영예의 자리다. 매월 정액 수당이 지급되고 예우와 지원이 이뤄진다.“"이제 나는 알겠다. 신춘문예에 세 부문이 당선되고 일류대학에서 30년 넘게 교수를 하는 나에게 그 찬란했던 명예는 더 이상 명예가 아니라 좀체 벗을 수 없는 멍에가 돼버린 것을 알겠다.나는 지금까지 문단 놀음에는 낀 적이 없으며 내 작품에 대한 평이나 기사를 잘 내달라고 누구한테 눈웃음 판 적이 없다. 이름을 가리고 작품을 써도 제대로 평가되는 진정한 문학의 시대, 그런 익명의 시대가 온다면 나는 당장 교수직을 내던지고 전업작가 전업시인의 길로 나서겠다고 흰소리를 쳤던 젊은 날이 어제 같다."(‘작가수업 오탁번’ 중)여전히 글을 쓸 때면 가난과 절망 속에서 오로지 등단을 꿈꿀 때처럼 쓴다고 고백한다. 시 한편을 쓸때도 국어사전을 서른 번 뒤적일 정도로 여전히 ‘습작을 하는 병아리 시인’이라고 칭하는 그는 한국문학작가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하며 문단사에 이름을 새겼지만 ‘아직도 첫우리말을 걸음마부터 배우는 혀 짧은’ 아기 시인의 자세다.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나의 그림자에 놀라고개를 들면 보이던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마을의 높지 않은굴뚝에서 피어올라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대추나무나 살구나무높이까지만 퍼져 오르다가는,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사방으로 흩어지면서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바로 그 저녁연기였다(‘저녁연기’ 전문)시는 저녁연기 같은 것가난하지만 평화로운 마을,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바로 시란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때까지 뛰어 놀다가도 문득 저녁연기를 보며 어머니가 근심하지 않을까 깨닫는 것.저녁연기에서도 어머니 손짓을 발견하는 것. 그게 그의 시다.어머니, / 요즘 술을 많이 마시고 있습니다./ 담배도 많이 피웁니다. / 잘못했습니다. /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 할아버지 아버지를 잊지 않겠습니다. / 밥도 많이 먹고 잠도 푹 자겠습니다. (‘어머니’ 전문)백운국민학교 애련분교원서헌은 그의 모교였던 학교의 분교장이다. 정갈하게 가꾼 교정엔 텃밭과 정원이 있다. 연못엔 연꽃이 한창이다. 다가가니 금개구리가 첨벙인다.마당에 석보상절 글꼴로 ‘원서문학관’이라고 새겨놓은 돌이 놓여 있다. 여기서 다채로운 문학행사도 열었고 매년 어린이시인학교도 열고 문학캠프도 열었다. 여든을 앞둔 나이지만 여전히 교정을 돌보고 푸성귀를 키우고 글을 쓴다. 글은 그의 천형(天刑)이다. 방문했을 때에도 예술원에 보낼 시를 다듬고 있었다. 최근에는 그간 발표했던 소설을 묶어 여섯권짜리 전집을 냈다. 내년에도 여든을 기념해 책을 낼 생각이다.”치열하게 글을 쓰는 일은 더 하겠지만 이제는 장기 계획을 세울 수가 없어.“대문에 있던 ‘원서문학관’을 마당에 들여놓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찬란한 노동의 기쁨을 만끽하며 하루에 세 번 샤워를 할 정도’로 산골살이를 즐기는 편이지만 넓은 공간을 돌보는 풀과의 전쟁도 점점 수월하지 않다.이제는 문학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자신을 ‘활용’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슬픔은 슬픔끼리 풀려 반짝이는 여울 이루고 / 기쁨은 기쁨끼리 만나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흐르는 백운면 애련리에 진달래꽃을 씹으며 문학을 통해 세상의 허기를 달래주던 개구쟁이가 산다. 여전히 천진과 익살로 삶을 어루만지는 시인이 산다. 통일된 나라의 교과서에 <백두산천지>가 실리길 바라는 한 시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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