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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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새해에는 기본회복하고 한 단계 높은 곳으로 건너가는 한 해되길..." [새말새몸짓 이사장 최진석]202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는 기본을 회복하고 한 단계 높은 곳으로 건너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입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과 만사 만물은 멈추지 않고 부단히 “건너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한 단계 높은 곳으로 건너가서 지금보다 나아져야 합니다. 거기에 진정한 자유와 독립과 풍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존재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지식인들에게서 말이 제 자리를 잃었고, 최소한의 염치도 사라졌습니다. 새로운 문명의 흐름에 올라타기보다는 과거의 문법에 영혼을 맡겨 과거를 살고 있습니다. 호기심은 빛을 잃고 당위만 난무합니다. 기본을 포기하고, 기능에만 빠져 산 업보(業報)입니다. ‘기본’을 회복하고, 거기서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최진석, 「기본학교 취지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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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독립적 자아' [철학자 최진석]일에 지친 사람들이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휴대전화도 끄고 텔레비전도 안 보면서 어디 가서 혼자 사흘만 있어 보면 좋겠다.” 여러분들도 이런 생각, 해보셨죠? 그런데요, 혼자서 편안한 상태로 사흘을 보낸다? 그게 과연 말처럼 쉬울까요? 편안히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사람, 엄청난 수양이 된 사람이에요.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에요. 여러분은 온종일 편안히, 혼자서 보낼 수 있습니까? 매일 시간에 쫓겨 산다고 투덜대지만, 막상 나에게 사흘의 시간이 뚝 하고 떨어질 때, 아무런 마음의 혼란 없이 외롭지 않게 그 하루를 오롯이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혼자서 사흘 정도를 마음의 동요 없이 보낼 수 있는 사람은 독립적 자아가 준비된 사람이에요. 혼자 있어 보고 싶다고요? 혼자 있기 어렵습니다. 혼자 한번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고요? 혼자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 쉽지 않을 겁니다. 주변 조건이 안 좋다는 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잘 감당을 못할 거예요. 자기가 독립적 자아로 성숙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버거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자기가 사실은 자기에게 갖추어져 있는 어떤 틀에 의해 지배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틀이라는 것은 이념적인 성격을 가질 것이고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것일 가능성이 크지요. 그래서 자기가 관계 속으로 스며들지 않으면 편안함을 느낄 수 없는 구조가 자기한테 있어요. 집단 속에 용해된 자아가 더 편안해져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행할 때 어떤 모습들인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선진국 사람들의 여행 풍경을 보면 우리하고 많이 달라요. 여러 명이 함께하는 여행에서도 모두 각자가 조용히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같이 온 사람들끼리 놀거나 얘기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시간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 과정에서도 각자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얘기예요. 심지어 다정한 연인끼리 와서도 각자 놀거나 책 읽는 시간을 따로 갖더라고요. 우리는 어떤가요?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일을 함께해야만 합니다. 함께 게임을 하고 모두 함께 술을 마시고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행동을 통일하지 않는 일이 허용되지 않아요. 우리나라 여행단 풍경 속에서 혼자 조용히 독서하는 모습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여기서 어느 모습은 좋고 어느 모습은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모습이 더 친밀하고 끈끈할 수 있지요. 하지만 저에게는 우리의 여행 모습이 아직 독립적인 주체의식이 약한 것으로 보이는 것을 피할 수 없군요. 집단을 이겨낼 수 있는 독립성이 부족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자기 욕망이 집단의 체계를 뚫고 나오지 못하는 것이지요. 집단이 ‘나’들을 수용하여 소화해 버리면 안 됩니다. ‘나’들의 자발적 총화로 집단이란 것은 이루어질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독립적 자아로 재무장하지 않고, 독립적 자아로 새로워지지 않고 창의적 생각이 가능하겠습니까? 상상력이 가능하겠어요? 인격적 기품, 학문적 성숙, 창의적 상상력,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독립적 주체력의 파생 상품들입니다. 최진석, 『인간이 그리는 무늬』, 소나무, 2013, 192-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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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판 자체를 새롭게 벌이려는 시도, 그것이 철학이다 [최진석]철학적인 시선은 분명 세상을 바꾸는 힘을 제공한다. 세상 속의 잡다한 변화를 마치 수학자가 ‘수’를 가지고 압축해서 포착해버리듯 철학자는 ‘관념’으로 압축해서 다룬다. 이것은 매우 높은 차원의 지성적 활동이기 때문에 거대한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여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거나 새로운 ‘방향’을 생산한다. 세상에 다른 흐름을 제공하기도 하고 세상을 새로운 방향으로 끌고 가기도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idea’가 그런 역할을 했다. 데카르트의 ‘물질’과 ‘정신’이라는 실체관도 근대를 수학적이고 양적이며 확실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서 근대적 세계관을 인도했다. 포이에르바하의 ‘물질’도 그렇고 프로이트의 ‘무의식’도 그렇다. 철학적인 시선으로 포착한 ‘관념’적 범주들이 세계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동하도록 했다. 또한 공자나 노자가 말한 ‘도道’도 세상을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끌고 가는 역할을 했다. 철학은 이처럼 세계를 바꾼다. 아니면 철학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뀌는 세계를 철학적 시선이 가장 앞서 포착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든 아니면 세상의 변화를 높은 차원에서 먼저 인지하든, 철학은 적어도 우리에게 세계의 변화 자체를 인지시키고 거기에 반응하도록 하는 힘을 갖게 한다. 이런 이유로 철학자는 항상 혁명가며 문명의 깃발로 존재한다. 그래서 철학적인 시선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도전이다. 철학적인 삶은 분명 또 하나의 세계를 생성한다. 판 자체를 보기 때문에 새판을 짤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삶은 변화의 맥락에 주도적으로 동참하는 능력이 떨어져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스스로 생산하기가 쉽지 않다. 판 자체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새판 짜기’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존의 판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삶’ 자체에 대한 인식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이미 정해진 삶의 방식을 답습하며 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남들이 먼저 생산해놓은 것을 따라하거나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만 한다. 지식의 축적 여부를 떠나 지성적인 높이를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가 그 삶의 격을 결정한다. 그 지성의 극처極處에 철학이 있다. 이 극처 주위에 우리가 일상 속에서 접근하기 쉽지 않은 여러 분야들이 상하좌우로 맴돈다. 수학, 예술, 물리학, 문학, 사학… 이런 것들이다. 이런 분야들이 세계를 높은 지성의 위치에서 포착한다. 이들은 세계를 물리적인 원리로 포착하거나 화학적인 연관으로 포착하거나 ‘수’로 포착하거나 ‘관념’으로 포착한다. 포착된 그것들을 ‘형상’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이 높이에서 한 결정들이 구현될 때, 대개 창의적이다, 독립적이다, 전략적이다, 선도적이다, 선진적이다, 새롭다, 지배적이다 등등의 평가를 듣는다. 그렇지 않으면 따라한다, 복제한다, 종속적이다, 피지배적이다, 전술적이다, 후진적이다, 구태의연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창의적이고 독립적이고 선도적인 일들은 모두 관을 새롭게 짜는 결과를 낳는다. 최진석, 『탁월한 사유의 시선』, 21세기북스, 2018[2017], 9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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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이 셋, 애국자 다문화 가정 어렵게 만드는 정책 [다문화 가장 최유진][기사 특정 사실과 관련없음. 셋째 아이 출생 모습. 사진=오명규 기자] 저는 9살 아들 쌍둥이를 키우는 다문화 가정의 가장으로서 2015년 7월 1일 쌍둥이가 태어났고 필리핀 배우자의 사촌 여동생을 어렵사리 초정하여 자녀양육 목적(F1비자)으로 자택에서 기거하며 아이들 돌보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처음 아이들 8살 되던해까지 비자가 연장될수 있다는 말에 기분이 좋았지만 애기들 2살때 박근혜 대통령이 정책을 바꿔서 3년 비자만 하고 본국으 로 돌아가라는 청천병력 같은 소리를 들었고 울며 겨자먹기로 1년 비자만 받고 돌아가는 조건으로 각서를 썼습니다. 애들이 너무 어리기 때문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사촌여동생은 불법 체류자 자격으로 아이들 8살 때까지 아이들을 돌보다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직까지 한국에 남아 불법체류자로 살아간다면 아마 제가 이글을 쓸 자격이 없습니다. 그사이 집사람이 임신을 했고 2023년 11월 7일. 셋째 출산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전 저는 일하다 왼쪽 발목 인대 2개가 끊어져 인대 봉합술을 받아서 목발을 짚고 다니고 재활 치료까지 힘들게 받았습니다. 이번엔 집사람 친언니를 초청하는데 임신 사실 확인서, 제 수술확인서, 진단서 등등 생계와 육아가 어려워 친언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모든 서류를 첨부해서 필리핀에있는 한국 대사관에 서류를 제출했지만 불허 판정을 받았습니다, 집사람 친어머니도 편찮으시지만 여행비자 (90일) 초청을 하였더니 또 불허판정이 떨어졌습니다. 사유는 초청인인 제가 불법체류하게 했다는 기록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다시 제도는 원래대로 아이들 8살 될 때까지 비자 연장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저희는 정권 바뀔때마다 수시로 바뀔 수 있는 피해자 아닌 피해자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렇다쳐도 직계가족이나 부모님 초청하는데 이렇게 이산가족을 만들어 버리는 안타까운 현실이 너무 억울하고 분합니다. (장인어른은 코로나때 돌아가시고 저역시 아버지는 9살 어머니는 3년전에 돌아가셔서 한국에 도와줄 사람이 전혀 아무도 없습니다.) 주변에선 늘 그럽니다. 애들 셋 이면 애국자라고 ..맞습니다 저는 한국인이고 이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입니다. 제가 불법을 했다는게 잘한건 아니지만 대한민국에 아이들을 안 낳고 있는 큰 현실속에 직면하고 있고 나라에서 어떠한 정책을 편들 이러한 현실적인 제도가 바뀌고 완화하지 않은들 출산률은 더 현저히 떨어지고 미래를 책임질 꿈나무들이 줄어든다는 비참한 현실과 다문화 가정때문에 대한민국에 그나마 출산률을 작은 보탬이 되었습니다. 매매혼이니 신부를 돈으로 사서 결혼 했느니 하면서 따가운 선입견 속에 한국에서 구성원으로 살아가지만 그래도 이 아이들은 엄연히 한국인입니다. 이 다문화 아이들 마져도 없었다면 출산률 통계자료가 현저히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제가 초청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초청인으로 하여 장모님이나 집사람 친언니를 데려오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초청인은 직계관련 한국사람만 가능하며,....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돌아가셔서 초청할 수 있는 사람이 한명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정책이 맞는건지 너무 억울 합니다. 저와 같은 다문화가정에 어려움을 한번더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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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최진석 (사) 새말새몸짓 이사장..."한번해 봅시다!"최진석 이사장. 36년간의 식민지를 벗어나 신생 독립국으로 재탄생한 우리는 소란과 갈등 속에서도 찬란한 역사를 썼습니다. 경제, 정치, 문화, 학술, 사회, 과학 등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고, 세계는 이것을 기적이라고 평가합니다. 건국(새정부수립) - 산업화 – 민주화의 직선적인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현대사에서 이런 기적을 이룬 나라는 우리가 거의 유일합니다. 대한민국은 기적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멈췄습니다. 흔히 말하는 중진국 함정에 빠졌습니다. ‘따라하기’와 훈고의 습관을 벗지 못하고 있으며, 정치는 진영에 갇혔습니다. ‘민주화’ 다음으로 넘어가는 도전에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중진국 함정을 빠져나와 민주화 다음을 도모하는 일입니다. 민주화 다음의 단계를 일단 선도력을 갖춘 나라, 즉 선진국으로 표기하기로 합니다. 건국 세력(새정부 수립 세력)은 자신의 역할을 한 다음, 산업화 세력에 의해 도태되었습니다. 산업화 세력은 자신의 역할을 한 다음, 민주화 세력에 의해 도태되었습니다. 역사의 발전이란 과거 세력이 도태되고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는 것 이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민주화 세력이 도태되고, 선진화 세력이 등장해야 할 시점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선진화를 담당할 새로운 세력을 등장시키느냐 못 시키느냐로 판가름 날 것입니다.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합니다. 전술 국가를 넘어 전략 국가로 상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 높이에 오를 수 있는 시선으로 무장하고 인격적으로 단련해야 합니다. 삶의 태도와 시각에 전면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훈고의 습관을 창의의 생명력으로 바꿔야 합니다. 대답하는 습관을 질문하는 습관으로 진화시켜야 합니다. ‘따라하기’를 넘어 독립적 사고력과 태도를 갖춰야 합니다. 더 과학적이어야 합니다. 감성을 벗어나 지적인 논리를 갖춘 독립적 인격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예술과 문화와 인문적인 소양을 갖춰야 합니다. 감각과 본능에 좌우되는 판단 능력을 좀 더 이성적이고 논리를 갖춘 사고력으로 성장시켜야 합니다. 어떻게 살다 갈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본격적으로 묻기 시작해야 합니다. 헌 말 헌 몸짓과 과감하게 결별하고 “새말 새몸짓”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존해 온 민족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번영시킨 나라입니까. 여기까지만 살다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한 번만 더 각성하면, 더 자유롭고 더 독립적이며 더 높이 살다 갈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에 함께 해주실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한 번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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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자신만의 길' [최진석][철학자 (사)새말새몸짓 이사장 최진석] 대학에서 학생들이 여러 가지 문제로 방황하는 모습을 많이 봤는데요. 상담하고 돌아갈 때 대개 이렇게 말합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자기가 걷고 싶은 길을 찾은 사람은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심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심은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이 온전히 자기의 길이라는 확신이 없을 때 하는 것이지요. 『노인과 바다』에는 산티아고 할아버지가 ‘나는 좀 더 성실해야 해. 열심히 해야 해. 게으르면 안 돼’하며 다짐하는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부라는 직업이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말려도 가는 길이지요. 외로워도 가는 길, 늙어도 가는 길, 큰 상어들과 전투를 치르고 난 후에도 가야 할 길입니다.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은 그 전투와 여정에서 많이 흔들립니다. 그리고 신세타령을 시작하지요. 더러는 울기도 하고요. 하지만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상어와 싸우고도 자기만족에 어린아이같이 평화롭습니다. 많은 사람이 무엇을 할 때 열심히 하겠다고 결심하는데요,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걷는 길에 자기 자신이 없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려면 몇 가지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내가 죽기 전까지 해내야 할 사명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을 매우 절박하고 적극적으로 제기해 자기만의 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길을 찾을 때 다른 사람에게 좋아 보이는 것, 부모님이나 사회가 좋다고 하는 것을 좇으려고 해요. 물론 이것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일치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을 집중적으로 던지는 단계를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사람이 ‘열심히’라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저도 ‘이것이 내 일이구나’라고 자각하기 전까지는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오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내 길이 나를 완성시키는 중요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까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진심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최진석,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 열림원, 2022, 144~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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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나 홀로 읽는 도덕경...'틈과 여백' [최진석 (사)새말새몸짓 이사장]『성경』을 백 번 읽은 사람과 한 번만 읽은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성경』을 백 번 읽은 사람은 불자들과도 평화롭게 지냅니다. 그러나 한 번만 읽은 사람은 불자들을 쉽게 적대시합니다. 『반야심경』을 한 번만 읽은 사람과 백 번 읽은 사람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반야심경』을 백 번 읽은 사람은 기독교인과도 잘 지내지만, 한 번만 읽은 사람은 기독교인을 적대시합니다. 제일 무서운 사람이 책을 한 권 혹은 한 번만 읽은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들은 항상 과감하거든요.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은 헛똑똑이가 되어 생각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생각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섭고 가엾죠. 중국의 홍위병들을 생각해보세요. 한쪽을 선택하여 거기에 자신을 맡긴 자들은 생각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진영에 빠진 자들이지요. 진영에서 시킨 대로만 할 줄 알지 자신의 독립적 사유 능력은 거세됩니다. 대립면의 상호의존을 의식하는 자들은 숙고하는 버릇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모든 악의 근원은 무지하여 사유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무상생(有無相生)으로 표현되는 대립면의 공존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어느 한쪽을 선택합니다. 물론 누구나 결국에는 선택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깊은 사유에서 나왔으냐, 아니면 아무런 사유없이 나왔느냐에 따라 그 성숙도가 설득력이 매우 다르게 나타납니다. 진영에 갇혀 별생각 없이 한쪽을 선택하여 고착시킨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는지 의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양심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죠. 대립면의 상호의존이라는 인식을 가지면, 진영 논리에 빠져서 그 진영의 논리를 상대방에게도 쉽게 강요하는 일이 적어집니다. 대립면의 상호의존이라는 원칙을 적용하여 유무상생을 보면, ‘유有’가 ‘유有’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무無’와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유’의 존재적 테두리가 매우 느슨하거나 흐리거나 그 자체에 틈이 존재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물론 ‘무’도 마찬가지죠. 느슨하거나 흐리거나 그 자체에 틈이 있어야 대립면을 받아들이고 허용하여 상호의존할 수 있게 됩니다. 진영에 갇힌 자들은 협치를 할 수 없습니다. 포용력을 갖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협치나 포용은 협치나 포용을 하는 주체에 틈이 나있고 여백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틈이나 여백이 없다면, 다른 대립면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죠. 틈이 없는데 어떻게 대립면이 뚫고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틈은 존재의 균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면을 받아들일 가능성으로서의 여백 정도입니다. 진영에 갇혀 상대방에게 쉽게 프레임을 씌울 경우엔 어떤 여백도 존재하지 못합니다. 틈이 없어지요. 틈과 여백이 없으면 거기서 어떤 감동도 생기지 못합니다. 감동이 없으면 논리로 무장한 살벌한 비난만 남죠.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입니다. 조선시대 당쟁이나, 진영에 빠져 서로 비난만 일삼는 지금의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죠.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처럼 개념을 바르게 정하여 사용하자는 말은 어떤 개념도 여백과 틈을 주지 말자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도덕경의)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은 개념을 여백이나 틈 없이 사용해서 세계의 진실을 담을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 세계는 서로 여백을 나누며 틈을 허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유무상생(有無相生)인거죠. 저는 보통 사람들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시인은 언어를 지배한다고 생각해요. 시인은 언어를 재배치하고, 위치를 다르게 하며, 개념과 개념 사이에 틈과 여백을 남깁니다. 그 틈과 여백 사이에 소리를 심죠. 언어들 사이의 남겨진 틈과 여백들이 소리를 입은 개념들에 탄력을 주어 드러나지 않거나 아직 없는 진실들을 튀어 오르게 하죠.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이 생산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재배치하고 부리면서 거기에 틈을 만들고 그 틈 사이에 소리를 입혀서 탄력있는 감동을 만들어내는 거죠. 협치나 포용이나 하는 것들은 배척이나 편 가르기에 비해 얼마나 큰 감동을 줍니까? 또 얼마나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겠습니까? 다 여백과 틈에서 빚어진 감동입니다. 최진석, 『나 홀로 읽는 도덕경』, 시공사, 2021, 130~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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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읽기와 쓰기' [철학자 최진석](사)새말새몸짓 이사장 최진석. 우리는 끊임없이 읽는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마주치는 모든 사건과 세계를 읽고 또 읽는다. 산다는 것은 그래서 ‘읽기’다. ‘읽기’의 원초적 동인은 무엇인가? 바로 지루함이다. 건조함이다. 쾌락과 즐거움을 원하기 때문이다. 건조한 대지 위에 비가 내리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읽기’는 일상의 여러 편린들 가운데 그저 그런 또 하나에 머무르지 않고, 바로 존재론적 의미를 가져 버리는 것이다. 읽으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은 쾌락을 원하지도 않고 심심함을 자각하지도 못한다. 자신의 존재가 자신에게서 확인되지 않으니,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지루하거나 심심하다고 느끼는 마음의 그 자리가 바로 자기 존재의 터전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읽기를 원한다. 이는 다른 (사람의) 세계로 초대받는 일이다. 지루함을 시시각각 자각하는 힘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만의 생명력을 잘 지키고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뿌리가 튼튼하여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저것 자잘하게 따지지 않고 그 초대에 기꺼이 응한다. 초대에 응하여 초대자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귀 기울이기가 무르익을 때쯤, 그래서 초대자가 닦아 놓은 길들이 편안해질 때쯤, 그 길 위에서 오히려 자신을 만나는 일을 경험한다. ‘읽기’는 결국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일로 매우 성숙해진다. 읽는 일을 통해서 우리는 초대자와 대화를 하고, 대화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초대자의 안내로 그가 준비해 놓은 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길을 찾게 되는 극적인 소득, 이것이 ‘읽기’의 소명이다. 읽다가 자신을 대면하면 이제 자신의 길을 도모하게 되리라. 읽기로 찾아진 자기 자신의 생명력이 확장의 욕구를 표현하는 형국이다. 수용의 형식에서 발산의 형식으로 전환되는 이 과정은 읽기가 매우 성숙해질 때쯤 형성되는데, 그 발산의 형식을 우리는 초점을 좁혀 총체적으로 ‘쓰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읽기’는 수용이고, ‘쓰기’는 발전이자 표현이다. 이 극적인 일은 ‘자기 자신’에게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주의하자. 우리가 읽는 그 무엇은 다른 사람이 써 놓은 것이다. 나의 ‘읽기’는 타인의 ‘쓰기’다. 이런 의미에서 ‘읽기’에는 ‘쓰기’가 ‘흔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읽기’가 ‘읽기’만으로 있고, ‘쓰기’가 쓰기만으로 있지 않다. 어디 ‘읽기’와 ‘쓰기’만 그러하겠는가. 모든 일이 그러하다. ‘쓰기’와 ‘읽기’는 다른 두 사건이 아니라 기실은 하나의 사건이자 하나의 동작이다. 동시적 사건의 다른 두 얼굴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읽기’의 과정에는 반드시 ‘쓰기’의 활동이 예정되어 있어야 한다. 들어오는 일은 나가기 위해서고, 나가는 일은 들어오기 위해서다.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지를 못하거나,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생명’으로 승화될 수 없다. ‘생명’력이 넘실대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한편에 말뚝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성장이나 변화는 바라지도 못한다. 생명력이 있는 살아 있는 주체는 들어오기만 하거나 나가기만 하지 않고 부단히 들락거릴 수 있다. 들락거리면서라야 주체는 무럭무럭 자란다. ‘읽기’와 ‘쓰기’는 하나의 활동이다. ‘쓰기’의 활동이 예정되어야 ‘읽기’는 비로소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된다. 옥수수의 생명이 되었던 물방울이 긴 여정 후에 승천하여 다시 지상에 강림하듯이 하강과 상승을 하나의 사건으로 품은 물방울만이 비로소 생명이 되는 것과 같다. ‘읽기’와 ‘쓰기’를 하나의 활동으로 내장할 수 있는 주체를 우리는 비로소 독립적 주체라고 말한다. 독립적 주체는 ‘읽기’를 사명감으로 하거나 기억하기 위해서 하지 않고, 우선 재미로 혹은 심심풀이로 하기 시작할 것이다. 주장하기 위해서 읽지 않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읽을 것이다. 최진석, 『경계에흐르다』, 소나무, 2017, 63~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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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자신만의 생각에 갇히지 않는 사람[철학자 최진석][최진석 (사)새말새몸짓이사장.]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절에 갈 때마다 듣는 말이 있다. “상(相)을 짓지 말라.” “성불(成佛)하십시오.” 여기서 ‘상’은 마음속에 스스로 지은 틀이다. 보통은 누구나 이 틀을 통해 세상을 보고 판단한다. 자신의 의견이나 관점도 대부분은 이 틀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상을 짓지 말라’는 자신만의 틀로 세상과 관계하면 전혀 이롭지 않다는 경고다. 왜냐하면 세상은 넓고 복잡하며 유동적인데, 좁고 굳은 틀을 갖다 들이대면 세상의 진실과 접촉하지 못하고 넓디넓은 세상의 좁다란 한 부분만 접촉하거나 유동적인 세상의 굳은 한쪽만을 지키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넓은 것을 좁게 보고 움직이는 것을 정지한 것으로 보면 이롭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세상의 진실이 아니라 자신이 정해놓은 진실을 배타적으로 강요하는 일을 ‘상을 짓는다’라고도 하고 ‘소유(所有)한다’라고도 한다. 따라서 상을 짓지 말라는 말은 무소유(無所有)하라는 말과 같다. 상을 짓지 않거나 무소유하면 진실을 접촉할 수 있다. 세계의 진실을 접촉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은 판단이나 결정을 그 흐름에 맞게 할 수 있으므로 성공한다. 그 흐름에 맞추지 못하면 실패하고 패망할 수밖에 없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크고 강한 존재가 바로 부처다. 부처는 세상은 한순간도 멈춤이 없고 고정된 뿌리를 가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세상의 진실은 이러하다. 그래서 한 생각이나 한 대상에 밀착하는 행위인 집착이 가장 헛된 일이다. 헛된 생각과 헛된 행위로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 상을 짓지 않음으로써 헛된 생각과 헛된 행위를 벗어날 수 있으면 그 순간 부처가 된다. 가장 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상을 짓지 않으면 부처 정도의 큰 사람이 되고, 부처 정도의 큰 성취를 이루려면 상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다른 가르침에서 추앙하는 성인도 이에 가깝다. 결국 가장 큰 인격은 자신만의 생각에 갇히지 않는 사람이다. 경청이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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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랑해요, 엄마 [유용숙](유용숙 자유기고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이름, 어머니는 드넓은 대지다. 어머니의 대지야말로 생명의 젖줄이다. 모든 걸 품을 수 있고, 내어줄 수 있는 그 너른 땅은 그래서 더 소중하고 끈끈하다. 어머니의 단어가 내포하는 따뜻한 느낌은 자연적이며, 끝없는 사랑의 위대함이다. 이유가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 모성은 내치는것이 아닌 오로지 수용하는데 그 본성이 들어있다. 분별심이 없으며 차갑거나 얼어붙은 것까지 녹여내는 건 모성이기에 가능하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날짐승이거나 세상의 모든 생명을 잉태하는 건 그래서 더없이 숭고하다. 어머니란 이름은 지극히 부드러우면서도 강하다. 풀잎처럼 여린듯 하면서도 결코 흔들림 없으며 꿋꿋하면서도 쓰러지지 않는다. 모든 자식들은 어머니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커다란 나무로 성장했다. 코로나가 끝나갈 무렵 추운 겨울에 시골에 들렀다가 엄마는 아주 오래전 젊어서 고생한 친구를 만나 보고 싶어했다. 30여년 흐른 세월앞에 읍내는 많이 변해 있었고 물어서 찾아갔다.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곤 친구와 엄마는 쌓인 얘기를 쏟아냈다. 한참 얘기를 하던중에 엄마 친구의 남편과 아들은 먼저 소풍을 떠났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티브만이 유일한 낙이더라고 하면서 눈가를 훔쳤다. 그 외롭고 헛헛한 마음을 자식이 매만져주지 않으면 무얼로 위로받을 수 있을까. 머리는 흰눈이 내렸고 거동도 불편하고 누군가 부축해야만 되는 나이, 우리도 그날이 멀지 않았음을 안다. 더 늦기전에 서둘러야 한다. 이땅의 어머니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아는가.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는 소소한 즐거움, 함께 햇살 좋은 들녘으로 나가 봄날을 만끽해 보는 행복감, 어머니는 옆에 자식이 있는것만으로도 만족해하신다. 더 많은 걸 바라지도 않으신다. 이제 몸도 마음도 한없이 헐거워진 어머니, 다리 성성할 때 여행 한 번 가는 것도 꼭 해볼 일이다. 나중에 해야지 뒤로 미룬다면,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른다. 모든 맘먹었을 때 바로 지금이 가장 좋을때이다. 눈도 귀도 어두워지고 느려지는 나이, 바람은 휑하니 옆구리를 파고든다. 이세상 모든 어머니들은 자신의 삶은 뒷전이다. 제. 색깔로 살아본적이나 있었을까. 가만가만 잠든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볼때가 있다.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하고 세파에 찌들린 저 가난하고 힘없는 모습은 그대로 뜨거운 눈물이 된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지만 역할을 바꿔 훈장을 달아 드려보는것도 좋겠다. 여직 무탈하게 잘 보낸 모두의 삶을 위해서 그리하여 한껏 가벼워진 마음으로 남은 길을 미소지으며 갈 수 있도록, 아, 다시 오월이다.이번 오월은 내 시간을 나눠드리는 날로 정하면 좋겠다. 책임과 의무가 아닌 의례적인 날이 아닌 연인을 만나러가듯 설레는 마음으로 가는거다. 너무 진부해서 식상한 사랑,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결이 다르다. 화려하거나 아름답게 빛나는 인생을 살진 않으셨어도, 그 이면엔 그래도 퍼올릴 수 있는 샘물이 남아 있다. 마르지 않는 모성이라는 샘, 힘들고 기댈데가 없어도 어머니의 품만 있으면 다시 기운을 얻는다. 살아갈 힘이 솟구치는 것이다. 가냘프고 마른 몸은 위태롭고도 안쓰럽다. 삭막하고 건조한 도시에서의 삶에 쫓긴 사람들, 무슨날이 아니더라도 가끔 찾아가 안겨보는 시간을 내어보면 어떨까? 어머니, 어머니란 이름. 가장 소중한 건 눈에 보이지 않기에... 사랑해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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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제천시 농작업 일손 지원사업, 인기 짱이네!<사진 : 제천시 농업기술센터 농작업 일손지원 사업> <사진 : 제천시청 강희원 주무관> “농업기술센터에서 오셔서 콩을 탈곡해 주지 않았으면 올해 콩농사는 그냥 버릴 뻔했어요. 농작업 일손 지원사업이 효자예요.” 제천시 농업기술센터에서 해마다 일손 부족을 겪고 있는 농업 취약계층(고령 농업인과 여성 농업인 등)을 위해 펼치고 있는 농작업 일손 지원사업이 큰 호응을 얻으며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이 사업은 농업의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시작한 현장 위주의 찾아가는 농사 지원 서비스로, 일손 부족으로 애써 농사지은 농작물이 그대로 버려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다급하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 사업을 시작했다. 지난해에만 110건의 신청건수에다 작업면적이 29.4ha에 달하며, 2021년 하반기에 시작한 이 사업은 입소문이 농촌마을로 퍼지면서 사업 신청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이런 흐름에 발 맞춰 제천시 농업기술센터도 수요자 눈높이에 맞춰 발 빠른 행정으로 대응하고 있다. 먼저 경운‧휴립‧피복, 콩‧깨 탈곡을 비롯해 고춧대 자르기, 콩 적심 등 농작업 대행 종류를 확대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시비 100%가 들어가는 수억 원의 예산 확보에도 힘써 최신형 임대농기계도 대폭 구입했다. 보유 대수만 70종에 471대에 달하고 있으며, 여기에 농기계를 운용할 기술있는 기간제 근로자를 사전에 선발하여 영농서비스 제공에 빈틈없도록 하고 있다. 아울러 사업 신청자들이 고령, 여성, 영세농 등 취약계층임을 고려해 서비스 제공에 불편함이 없도록 농업기술센터 본소를 비롯해 북부, 중부, 남부 등 4개소에서 임대사업소를 운영하며, 여기에 지난해에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주관하는 농기계임대사업소 신축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동부지역에도 활발한 농작업 대행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쾌거를 올렸다. 무엇보다 취약계층 농업인들의 열악한 사정을 고려한 값싼 농작업 대행 이용료가 이 사업의 인기 비결로, 값비싼 농기계 구입 및 관리비용 절감에다 농기계 안전사고 위험도 줄일 수 있어 눈길을 끌고 있으며, 실제로 농작업 대행서비스를 신청하면 1,000㎡기준(약 300평) 기본 농작업료가 3만원으로, 농작업과 병행하여 틈틈이 농기계 조작방법도 쉽고 자세하게 교육시켜 농기계 활용 교육 효과도 확산시키고 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인구감소시대를 맞이하고 있으며, 농촌의 사정은 더욱 심해 농번기에 인력을 구하고 싶어도 발만 동동 구르는 실정으로, 특히 취약계층 농업인들의 마음은 타들어간다. 그런 가운데 제천시 농업기술센터에서 공을 들여 추진하고 있는 농작업 대행서비스가 가뭄에 단비처럼 농업인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진정한 공무원의 역할과 소명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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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배움으로 충전해 미래를 열다 … 제천시 올해 평생학습 프로그램 본격 운영연초를 맞아 전국적으로 평생학습 열풍이 뜨겁다. 자고 일어나면 순식간에 바뀌는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이다. 누군가는 발빠르게 적응하고 기술을 배우기 위해, 누군가는 자기만족과 여가생활을 위해, 누군가는 인문소양을 다져 더 나은 자신을 만들기 위해… 저마다 다른 사정으로 바쁜 일상을 쪼개 평생학습에 시간을 쏟는다. 이런 시류에 제천시도 연초를 맞아 2월 다양한 ‘시민맞춤형 평생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참가자를 모집할 계획이다. ▲상반기 정규 프로그램 : 6개유형, 25강좌 운영, 415명(모집 2.6.~22.) 그야 말로 “알토란 같은 강좌들이 즐비하다” 시는 총 25개 프로그램 중 14개의 프로그램을 신규 과목으로 채워넣었다. 인기과목을 제외한 절반가량이 신규 프로그램이다. 3월부터 6월까지 ▴꼭 알아야할 법률 상식, ▴홈가드닝, ▴건강밥상 등 생활 속 교양강좌부터 ▴MBTI로 보는 현재와 미래, ▴풍수지리와 인테리어 등 이색강좌도 마련됐다. 이 외에도 ▴떡제조기능사, ▴조경기능사 등 자격증 과정도 운영한다. 시 관계자는 “상반기 정규 프로그램은 오는 2월 6일부터 2월 22일까지 선착순 접수할 예정이니 시민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가 기대된다”고 전했다. ▲강사가 직접 주민에게 찾아가는 ‘주민학당’(모집 2.13.~14.) 주민이 신청하면 프로그램 강사가 읍면동 배움터를 찾아가 직접 교육한다. 읍면지역은 6명이상, 동지역은 10명이상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학습공간, 기자재만 확보하면 시에서 20개소에 3월부터 11월까지 강사를 지원해준다. 수업을 신청한 적이 없거나, 수료 이후 재능기부, 지역현안 해결 등 파급효과가 큰 경우 우선 선정된다. 오는 2월 13일부터 14일 오후 4시까지 신청이 가능하다. ▲배움의 빛으로 새로운 세상을 밝히다 …“힐링문해학교”(모집 2.13.~24.) 대한민국의 문맹률은 1%에 가까울 정도로 낮은 수치다. 그런 만큼 문맹이었을 때의 불편함은 상당하다. 이에 시는 비문해자를 대상으로 “힐링문해학교”를 3월부터 9월까지 운영한다. 이 사업은 읍면지역 6명 이상, 동지역은 10명이상 비문해 교육생들이 교육장소를 확보하고 신청하면 강사를 지원해준다. 올해는 신청은 2월 13일부터 24일까지 모집한다. 특히 올해로 10차를 맞이한 힐링문해교실 어르신 8명은 ‘2022 충북 문해교육 한마당’에서 충청북도지사상(이한분 ‘배우는 기쁨’), 충북도교육감상 (최은숙 ‘내 마음에 봄이 왔어요’) 등을 수상해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했다. ▲평생학습 우수동아리 및 프로그램 지원사업(공모 2.20.~24.) 평생학습을 위해 자발적으로 구성한 동아리, 복지관 등 평생학습 관련 기관 및 단체를 발굴, 육성하기 위해 지원 공모사업도 펼친다. 시에 등록된 동아리 중 사업취지에 적합한 우수 동아리 33개를 선정해 100만원 ~ 150만원을, 우수 프로그램을 진행한 기관·단체 10개소에 각 150만원을 보조한다. 공모접수는 오는 2월 20일부터 24일까지 하면 된다. 시 관계자는 “위 사업 외에도 순회특강, 기업 및 장애인 맞춤형 평생학습 등을 계획 중에 있다”며 “앞으로도 시민 수요에 발빠르게 대응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위 사업과 관련하여 더 자세한 사항은 제천시 평생학습관(☎043-641-5491~2/5462)에 문의하거나 제천시청(https://www.jecheon.go.kr) 및 제천시평생학습관(https://okjcedu.jecheon.go.kr/) 누리집을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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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잡스러워진 손에 담아야 할 것 [최진석][최진석 (사) 새말새몸짓 이사장] 대한민국의 근본정신은 헌법 '전문'에 담겼다. "대한민국은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한다." 헌법에 국가의 원수로 규정된 대통령은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확보할 것을 사명으로 가진 사람이다. 이 사명을 달성하려면 반드시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직접적인 힘이요, 다른 하나는 힘의 원천이다. 결국 국방과 조세(경제)다. 이렇게 본다면, 국가의 목표는 당연히 부국강병이다. 이제는 좀 촌스러운 말처럼 들리게 되었지만, 국가에 이것이 가장 근본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논쟁은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순수하더라도 부국강병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멀리하고, 도움이 되는 것은 가까이 둬야 한다. 물론 통치자의 처지에서 하는 말이다. 이것이 어떤 한 기관이나 조직이나 개인과 국가가 다른 차원이 되는 지점이다. 동네에서 살인은 중죄지만,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은 큰 명예다. 폭력을 위임받지 않은 국가 내의 작은 조직이나 개인들과, 폭력을 위임받은 국가 사이의 차이다. 권력을 다툴 때는 내 울타리 밖에 있던 반대 세력조차도 권력을 잡고 나면 내 뜰 안에 들어와 있다. 반대자도 품을 수밖에 없는 운명 속으로 빠진다. 울타리가 갑자기 넓어져 버린 것이다. 이 차이를 분간하지 못하면 정당 지도자에서 국가 경영자 혹은 통치자로 변신하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신흥국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정치 발전과 경제 발전을 동시에 이룬 나라다. 하지만 '정치'부문에서의 발전은 경제에서의 그것보다 더 울퉁불퉁하고 전진과 후퇴에 질서가 없다. 끝이 좋은 대통령을 갖지 못한 것만 봐도 안다. 그것을 실패라고 말할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왜 모두들 끝이 안 좋았을까. 정치 지도자에서 국가 경영자 혹은 통치자로 변신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정치는 명분과 이념으로 덤비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다. 선명성도 높이고 전투력도 배가시킬 수 있다. 세를 결집시키는 데에도 효율적이다. 그렇게 해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하면 그 승리에 취해 변신을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사용했던 방법을 그대로 계속 사용하다가 차원이 다른 국가 레벨의 경영에는 실패한다. 정치 지도자일 때 명분과 이념으로 재미를 보았더라도 국가 지도자는 명분과 이념을 버리고 철저히 부국강병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순수한 명분을 버리고 잡스러운 이익 쪽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해야 한다. 명분은 구분의 정치력이다. 이익은 통합의 토대다. 이념과 명분이 강조되는 한, 통합이라는 구호가 실제로는 또 하나의 배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에는 새로운 이념으로 통일 대업을 이루고도 경제를 파탄 내서 결국 국력을 소진한 두 영웅이 있다. 진시황과 마오쩌둥이다. 한편, 극단적 이념의 지속적인 적용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본 다음 지도자들은 과감하게 명분과 이념을 버리고 모두 '이익'에 집중하여 위대한 성취를 이룬다. 유방과 덩샤오핑이다. 유방은 진시황의 중앙집권 체제 이념을 버리고, 반동 세력이던 지방분권 체제를 과감하게 수용하여 두 세력을 공존시키며 큰 업적을 남긴다. 덩샤오핑도 마오쩌둥의 극단적 이념성을 버리고, 검든지 희든지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하면서 철저히 '이익'에만 집중한다. 큰 성취가 이뤄지는 토대는 명분이 아니라 이익이다. 명분은 순수하고, 이익은 잡스럽다. 당연히 통치자는 스스로를 더럽히고 욕보이더라도, 국민들은 깨끗하고 명예롭게 살도록 해주는 존재다. 자기를 순수하고 명예롭게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오히려 잡스러워진 손에 그 명예와 순수를 담아 국민들에게 쥐여 주려는 존재다. 옛날에도 통치자들이 자신을 고(孤), 과(寡), 불곡(不穀), 짐(朕) 등과 같이 아주 비루한 언어로 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통치자가 되는 순간 그 사람은 명분을 공유하던 정치 동지들과 달라져야 한다. 통치자로 변신하면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심리적 결별이다. 그 사람은 고독하다. 최진석, 『경계에 흐르다』, 소나무, 2017, 242-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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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가장 인간적인 삶 [최진석][최진석 새말새몸짓 이사장.] 인간을 규정하는 말은 적지 않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파베르, 호모 루덴스, 호모 이코노미쿠스 등.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드는 일을 기준으로 한 분류들이다. 이런 모든 분류를 하나로 통합하여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인간은 문화적 존재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도전에 나서지 않는 인간은 인간적이지 않다. 문명은 인공적이고 조작적인 것이며, 이런 문명을 쌓는 인간은 인공적이고 조작적인 활동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 인공과 조작을 거부하고, 그냥 아무렇게나 하거나 내버려두는 것을 자연이라고 하면서 높은 차원의 것으로 인식하는 흐름이 있는데, 이는 인간적이라기보다는 패배적인 자세일 뿐이다. 문명을 건설하는 사명을 가진 인간에게 '자연적'이라는 말은 인위와 조작적 활동의 결과를 원래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경지까지 끌어 올렸다는 것이지, 인위와 조작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인간적인 삶은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삶이다. 다시 말해,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이고 창의적으로 사는 삶이다. 이런 삶의 태도는 있던 곳에서 없던 곳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변화를 야기한다. 아직 인식되지 않은 곳, 아직 경험된 적이 없는 곳으로 이동한다. 그래서 근본적인 의미에 닿아 있는 인간이라면 머무르지 않는다. 혁명의 깃발을 완장으로 바꾸지 않는다. '지속 부정'과 '새 말 새 몸짓'으로 무장한다. 지금 우리에게 '새 말 새 몸짓'은 무엇인가? 제도의 높이에서 멈춘 상태를 넘어 삶의 태도의 관점의 혁신을 감행해야 한다. 철학과 과학과 문화적인 높이로 상승하는 일이다. 중진국의 함정에서 벗어나 선진국 높이로 올라서는 도전을 감행해야 한다. 바로 문화적이고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단계로 상승하는 일이다. 건국과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 신화는 물건과 제도의 높이에서 이룬 발전이다. 후진국과 중진국 정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제 이런 성공 신화를 뒤로 물리치고 한 단계 더 높고 새로운 신화를 써야 한다. 산업화 세력이 건국 세력을 도태시키고 새로 등장했듯이, 민주화 세력이 산업화 세력을 밀어내고 나라를 새롭게 했듯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새 말 새 몸짓'으로 무장한 새로운 세력이 민주화 세력을 도태시키는 도전이다. 민주화 단계까지 올라서면서 하던 이야기와 주장을 아직도 계속하면서 그것을 지키려고만 하고 있다면, 당신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아직 인간적이지 않다. 권력과 재력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인간으로는 미성숙 상태에 있다. 깃발을 완장으로 바꿔 차고 그저 그렇게 살고 있는 사소한 사람일 뿐이다. 최진석,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2021, 252-254쪽 사진=새말 새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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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립사회와 고독사, '공동체가 함께 풀 해결과제'..."외로움 -고독도 질병으로" [박영희][ [나사렛대학교 학점은행제 사회복지학 박영희 교수.] 혼자 사는 가구 비중이 급증하면서 ‘고립 사회’ 현상도 심화되고 있다. 조사에 의하면 2020년 기준 혼자사는 1인가구의 수는 전체가구의 31. 7% 로 664만 3000가구라고 한다. 몸이 아파도 돌봐 줄 사람이 없는 1인가구의 고통은 심각하기만 하다. 더구나 나이가 있는 장ㆍ노년층의 삶은 더욱 힘이 든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빠르게 달려온 산업 발전의 시간과 갈등 상황으로 인해 유독 OECD국가 중에서 자살률, 이혼률, 우울증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할 천부인권의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립사회 - 고독사라는 용어가 일반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용어에 대한 국민들이 생각하는 ‘고립 사회’의 원인과 해결책은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0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자료에 따르면 20대(20.2%)와 70세 이상(18.1%)이 1인 가구 비중의 40%를 차지한다. 설문 결과 20대 청년 31.8%가 외로움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면서 고독이 따라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가족의 순 기능이 사라진 요즘, 따뜻한 대화와 위로, 정서적인 지지, 유대감 등 가족의 기능에서 하던 기능들이 1인가구에는 없는 현실이 됐다. 이런 외로움이나 고독들이 장시간 방치 될 경우 정신적인 문제등 부작용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제는 외로움이나 고독감도 질병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단순한 감정을 넘어 정신적 치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영희 교수 강의 모습.] 이런 '외로움이 사회적 질병으로서의 위협이 큰 만큼 정부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 또한 크다. 정치권 한쪽에서 제기되는 ‘고독처(Ministry for Loneliness)’ 등 부처를 만드는 것보다는 ‘1인 가구 맞춤형 지원’, ‘복지 체계 개편’ 등 현행 제도를 활용한 지원책이 더 필요하다는 의견이 다수다. 현 정치권 일각에서는 영국과 일본처럼 외로움을 전담하는 부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늙게 되고, 행동도 부자연스러워 보기에도 즐겁지 않는 노인이 된다. 그것은 바로 미래의 우리들,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노인 증가의 상황에서 본다면 급속한 노령화에 따라 고독사는 앞으로 더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것이 자명하다. 이런 사회적 고독관련 문제는 사회 공동체가 함께 풀어 나가야 할 과제로, 해결과제라 아니 할 수 없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세대와 세대간의 갈등, 소통부재 등 기본적인 신뢰관계에 대한 인간의 존엄성 회복이 필요하다. 세대간의 아름다운 소통 회복을 위한 전방위적 공동체의 노력과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써 앞으로의 고립사회와 고독사 문제에 능동적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면서 사회적 문제도 줄여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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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송구영신 '과이불개 (過而不改) -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 [최대승]과이불개 (過而不改) [최대승 시인.]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고 했건만 가눌 수 없는 무거움 짓누르고 차갑기만 한 마음 어찌 이리 어지러운가. 하얀 눈 펑펑 내리는 세밑 하늘은 춤추듯 날리어 교태를 부리고 무릇 가벼워질 심산인가. 온 누리 하얗게 덮어 깨끗한 척할 심산인가. 정리하지 못한 잡동사니 하 많아 버거운데 눈송이처럼 날릴 수 있다면 나는 차라리 가벼우리다. 돌아보면 잡다한 한해살이 내 것이 맞는가 싶다가도 좋았던 일 나빴던 일 한 움큼 잡히고 휘는 허리 아파서 자괴의 두 손을 모은다. 영영 버리지 못하는 욕심을 어이하랴. 하늘은 온통 눈송이뿐인데 손 내밀면 녹아드는 하늘의 교리(敎理), 과이불개 흘려듣는 낯두꺼운 허욕 삶은 여전히 내 것이기를 또 바란다. *과이불개(過而不改)=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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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산책] 신원사 가는 길 - 눈 사람 [오혜경][오혜경과 동창친구들. 사진=오혜경.]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인연인 줄 알지 못하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아도 그것을 살리지 못하며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릴 줄 안다. 살아가는 동안 인연은 매일 일어난다.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육감을 지녀야 한다. 사람의 인연도 있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인연으로 엮여있다. 그리워하는데도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인연이 있으면 천리 밖에서도 서로 만나고 인연이 없으면 얼굴을 대하고도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지기 마련이고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 [인연-피천득]" 이는 2022년 12월의 어느 날, "12월의 오늘은 좋은 글로 문을 여네요"라며 오혜경 귀산초 26회 동창 이 '피천득 의 인연'을 친구들에게 '오늘도 화이팅!'하며 전한 행복의 메시지다. 오혜경의 주옥같은 글 3편이다.[편집자 주] 1. 신원사 가는길 [오혜경] 노오란 은행잎 어느 여인의 치막 자락으로 덮힌 아름다운 길가을 바림에 국화꽃 향기 가득했건만 캄캄한 길 밝혀줄 달빛은 없었다네. 설레임으로 가득채웠던 봄날들이 사라질때 막막하던 시간들은 흔적으로 남고 그래도 고향 땅 그곳엔ᆢ졸졸졸 시냇물흐르고 사계절 지나는 정겨운 소리 들린다. 네 타향에서 속절없이 지나온 시간들 그래도 저래도 고향땅에 누워보네. 2. 동창회 - 그리움으로 우리 인생은 나무 그늘 아래서 잠시 쉬어가는 것과 같다. 귀산초등학교라는 큰나무 아래서 봄이면 아름다운 새싹이돋고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이 태양을 막아주고 가을이면 아름다운 단풍으로 수를 놓으며 겨울이 하얀 눈으로 힘든 마음을 녹이리라. 바람이 불면 나무에 기대어 잠시 쉬고 천둥이 치면 나즈막히 몸을 낮추며 잠시 쉬어가며 인생을 즐긴다. 모르는 것 보다는 아는 게 좋고, 아는 것 보다는 똑똑한 게 좋고, 똑똑한 것 보다는 즐기는 게 좋다더라. 슬픈 일이 건 좋은일이 건 즐겨라. 그러면 운명이 비켜서 간다. 잠시 쉬어가는 인생은 행복이란 두글자 내 곁에 있다. [오혜경] 3. 눈 사람 [오혜경] 하얀 눈을 그대도 좋아 하나요. 흰눈이 펑펑 내리던날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려 본적 있으신가요. 하늘위에서 잿가루처럼 쏟아지는 회색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길들이 사리지고 길가의 나무도 사리지고 지붕위 창문도 사라지고 모든 것들이 사라져 갈때쯤 눈쌓인 불빛 사이로 눈 시림 하나가 살포시 미소 짓지 않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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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세상과 공존하며...습관처럼 사랑하며 살아가야겠다"[오명규 기자/편집국장] 오늘은 2022년도 12월 3일 토요일. 올 한해도 마지막 한장의 달력이다. 코로나19의 일상속에 신중년을 사는 외로움의 시계는 파도처럼 밀려온다. 어느 연구 문헌에 의하면 인간은 관계속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공존이다. 이유가 뭘까 ? 퍼득, 편운 조병화 시인의 시 “공존의 이유”가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깊이 사랑하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헤어짐이 잦은 우리들의 세대/ 가벼운 눈웃음을/ 나눌 정도로 지내기로 합시다/우리의 웃음마저 짐이 된다면/ 그때 헤어집시다/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도록 합시다/ 당신을 생각하는 나를 얘기할 수 없음으로 인해/ 내가 어디쯤에 간다는 것을 보일 수 없으며/ 언젠가 우리가 헤어져야 할 날이 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 합시다/우리 앞에 서글픈 그날이 오면/ 가벼운 눈웃음과 잊어도 좋을 악수를 합시다." (조병화-공존의 이유, 전문) 인간의 근원은 본질적으로 고독하다고 한다. 항상 고독한 나그네. 나그네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돈다. 이웃과 친구와 만났다 헤어지고, 사랑하는 이와도 이별하기도 한다. 언젠가는 이 세상과도 이별할 것이리라. '회자정리(會者定離)'는 이 세상의 법칙!... '세상 일에 집착하지 말고 버리자고, 항상 떠날 것에 준비하자'고 되뇌어 보곤 한다. 인간은 '고독을 달래기 위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또한,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함께 공존하는 것이 행복이고 필요하리라. 그런 의미에서 “깊이 사랑을 하지 말자”는 편운 조병화 시인의 시어는 기자에겐 역설적으로 “습관처럼 사랑하라. 그리고 행복하라"라고 들리는 듯하다. 오늘 하루 이 순간도 세상과 소통하고 공존하며, 습관처럼 사랑하며 살아가야겠다. 일상의 행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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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세상의 그릇 - '나는 어떤 그릇으로 남고 싶은가' [유용숙][자유여행 기고가 유용숙] 세상에는 많고 많은 그릇이 존재한다. 크고 작은 것 깊고 넓은 것 좁고 오목한 것 넓고 얉은것까지. 다양한 디자인과 색깔과 무늬를 보면서생각한다. 나는 어떤 그릇과 닮았는지 너무 비싸거나 화려하거나 고급스런 그릇은 좋아하지 않는다. 내 취향과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그런 그릇들은 부담스럽고 쓰기에도 조심스럽다. 나는 그저 보기만해도 편안하고 화려하지 않는것이 좋다. 꽃무늬가 그려진건 음식을 담았을때 색이 죽는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않은 백자같은 그릇이면 좋다. 거기에 포인트로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잎하나 정도 애교로 있어도 좋다. 그릇을 보면 그 자체로 황홀해질때가 있다. 완전 작품같은 느낌이 드는 그릇 말이다. 내 마음을 끌리게 만드는 그릇은 은은한 색감이 번지는거다. 매끄러운 자기 말고 분청같은 막사발이 그나마 부담이 없다.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왠지 더 정감이 가는 것. 나도 분청같은 사람이고 싶다. 어떤 음식을 담아도 소박하고 순수한 멋, 뛰어나거나 유려한 곡선미는 없어도 좋다. 보면 볼수록 차분해지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그런 분청은 화장하지 않은 여인네의 얼굴같다. 맑고 단아한 얼굴 오월의 산뜻한 바람같은 분청은 지루하지 않다. 꾸민 것같지 않으면서도 내마음이 끌 리는 건 왜일까. 그 그릇위에 질박한 동치미나 나물같은 채소를 올려놓고 싶다. 그릇은 정말 많다. 한데, 손이 가는 그릇은 늘 가깝게 있고 그것만 찾게 된다. 어쩌다 한번 쓰게 되는 그릇은 자주 쓰는것은 아니지만 무슨날 때나 꺼내게 된다. 소중한 건 보이지도 않게 깊은곳에 넣어둔다. 자주 사용하는 그릇처럼 늘 곁에 두는 그런 그릇이고 싶다. 이것 저것 막 담길 수 있는 그런 친구같은그릇이면 좋겠다. 어느 누구라도 편히 대할 수 있는 그릇이라면 뭘 더 바랄까. 쓰다듬고 만져주고 가릴 거 없는 그런 막사발같은 같은 사람이고 싶다. 한껏 치장하거나 매끄러운 건 보기는 좋으나 금새 싫증나고 만다. 있는 듯 없는 듯 제 자리를 지키면서도 몫을 다하는 둥근 그릇이고 싶다. 지나치게 크지도 않고 아주 작지도 않은 그릇. 흔히 편협하고 속좁은 사람을 간장종지라고 말한다. 모두 쓰임새에 따라 다르지만 분별력을 가지고 보는 건 공평치 못하다. 나는 어떤 그릇으로 남고 싶은지 생각해본다. 가장.쓰기 편한 플라스틱 그릇은 가볍지만 볼품없고 무거운 건 힘이드니 그저 평범한 것이면 좋겠다. 내가 가진 그릇은 이만한데 더 큰 그릇을 갖고자 한다면 그것 또한 욕심인 것을. 분수를 알고 행한다면 넘쳐서 곤란한 상황은 없을 것이고 욕망을 크게 가지는 건 좋으나 무모하지 않으면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왜 '욕심이 화를 불러온다'는 말도 있잖은가. 날마다 그릇에 담고 비우고 씻어내는 것이 반복되지만 소소한 일상일상에선 가장 필요한 도구다. 쓰다가 깨지거나 금이 가고 흠집이 생겨도 쉬이 버리지 못하고 화분대용으로 사용한다. 그릇으로서의 소임은 끝났지만 그 안에 화초가 담기면 얼마나 예쁘고 향기로운가. 살면서 마음 다치거나 상처날 때가 있다. 세상 작고 보잘 것 없는 그릇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우리 모두는 하나 하나가 더없이 소중하기에,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선물들이기에. 내가 나를 존중하고 아끼며 사랑하는 날들로 채워 나갔으면 하는 바램으로 두손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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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누구나 쉬다 갈 수 있는 '마음의 창문 - 공간'을 만들자 [유용숙][자유기고-여행가 유용숙.] 문은 들고 남을. 통해서 반복한다. 열려 있는 문, 닫혀 있는 문 또는 어디른가 통하는 문. 그 분위기나 디자인에 따라 재질 문양 또한 제각각이다. 빈틈없이 완벽하게 닫혀 있는 문을 만나면 그냥 되돌아서게 되고 망설이게 되지만, 이상하게도 빼꼼이 열린 문을 만나면 용기도 생기거니와 안을 엿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투명한 유리 창문을 보면 훤해서 시원스럽게 보이는 게 거칠것이 없어 보이지만 감춤의 매력은 없다. 보일 듯 말 듯 은근스러움이 배어나와 사람의 정서를 자극하는 건 아무래도 창호지를 바른 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을날. 문창살에 국화꽃잎이나 낙엽따위로 문양을 넣어 햇빛에 말리면 참으로 고아하며 그 빛이 너무도 눈부셔 황홀할때가 있다. 지금은 그런 문이 드물기도 하지만 웬만한 집도 다 미닫이나 도어문으로 되어 보기 쉽지가 않아 아쉽다. 소슬한 바람이 불어오는 햇볕에 석류알 터지 듯 탱탱한 창호지 문은 딱딱하기보다는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풍경소리 만큼이나 다정하고 고요롭다. 희디흰 속살을 드러낸 것이 어찌보면 우리네 어머니의 속적삼 같다. 거기엔 티끌이 없고 순수함과 정갈함만이 스며 있어 더 향기가 배어나는지도 모른다. 그냥 종이만을 바른것이 아닌 낙엽을 함께 끼워 넣어 보는 이로 하여금 운치도 느낄 수 있고 계절의 바뀜을 알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창문이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다. 활짝 열어 젖혀 싱그럽고 상큼한 바람을 안으로 끌어들여 맑은 공기로 정화시킬 수도 있고 가슴이 답답할 때 바람을 쏘이면 한결 기분이 개운해 짐은 덤이다.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이나 저 혼자 피었다지는 들꽃이나 재잘되는 새소리도 다 우리에겐 무언의 가르침이 될 수도 있다. 고적함과 쓸쓸함이 밀려드는 밤이면 창문을 열어볼때가 있다. 싸한 밤공기를 마시며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청정한 하늘은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스산하게 만들때가 있다. 바쁠수록 하늘을 쳐다보며 살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그래도 위안을 얻는것은 문을 통해서 가슴을 씻어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닫혀있는 문은 사람의 욕망과도 같다. 괜시리 안을 훔쳐보고 싶은 그런 욕구 말이다. 감추어졌을때 더 호기심이 일어 확인하고자 하는것은 왜일까. 베일에 싸여 있을때만이 설레임을 동반한다. 드러났을때는 이미 부풀어올랐던 욕망은 사그라든다. 제약을 받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열린 문이 있다. 그것은 산 입구에 장승같이 서있는 일주문이다. 경계가 없어서 자유로우며 흐벅진 부처님의 온화한 자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일탈을 꿈꾸는 이들은 일주문을 만나볼 일이다. 산에서 낮게 더 낮게 몸을 엎드릴 수 있는 그곳은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등을 어루만져 줄 것이고 평정을 찾게도 해줄 것이다. 순하디 순한 노루의 눈을 닮은 해맑음이 있을 것이다. 이렇듯 문은 늘 어느때라도 깨어 있다. 누군가를 위해 열려 있어야만 한다.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문은 그런 것이다. 너와 나를 연계해 고리를 만들어주는 것 습관과 필요에 의해서 열고 닫힘을 수없이 반복하지만, 진정 우리는 문처럼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 젖힌적이 있었던가. 계산에 의해서 저 밑바닥에 마음을 감추고 표피적인 입술을 통해서 만이 관계를 지속시켜 온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열어젖힌 남성적인 호방함의 넓은문이기 보다는 반쯤 열려져 있다거나 다소 곳하게 발을 늘여뜨린 그런 문이 더 매력적이고 감칠맛나지 않을까.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보이면 상대방도 쉽게 마음의 문을 연다. 서로간의 문이 닫혀 있다면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틈이 벌어져, 지속되면 서먹하고 간격을 좁히기가 어렵다. 지나치게 완벽한 사람에게는 선뜻 다가가기가 쉽지 않고 주저하게 된다. 좀 비집고 들어갈 공간조차 내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따뜻한 인간미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 '맑은 물에는 고기도 살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걸 보면 아마도 사람의 성향을 빗대어 한 말인 듯 싶다. 어느 사람이라도 누구나 들어와 쉬다 갈 수 있는 마음의 창문과 공간을 만들어 보자. 그리하면 지금보다는 더 생기있고 윤기가 돌며 삶은 한층 여유로울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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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도육성제20기아카데미 '계룡산 철화 분청사기 이삼평 체험 활동' 소회 [서상억]공주대 고도육성 제20기 아카데미(사진)가 지난 15일 계룡산 도예촌 철화분청사기 체험 길에서 만난 인프라는 이재황 교수님의 절규가 역사적인 산실이었음에 공감하게 한다. 콘텐츠의 색감은 분명한데 이삼평 사기장에 대한 팩트 분명함에 엇갈린 견해로 양분화가 '이삼평이 이만평으로' 조각이 품격마져 산산조각하게 하는 체험으로, 체면지레까지 부끄러운 행정탓으로, 돌리기에도 도예촌 길거리에 걸린 현수막 한장 만이 눈살을 찌푸린다. 콘텐츠는 소비자와 원하는곳에 뿌려져야만이 경쟁력과 인프라가 마주한다. 이삼평 그자체가 경쟁력을 갖는다면 없는것도 만들어내는 소설같은 팩트가 공주지역경제활성화에 그 또한 세계적인 분청사기 공주 계룡산줄기에 매달려 가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야만이 '도자기판을 벌려줘야하는 행정' 만이 앞서가야 함이다. 체험을 마치면서 소감을 급히 적어 봤다. [서상억 공주대 고도육성아카데미 제20기 회장.] "산속에 묻힌 이름없는 문명, 분청사기 이삼평 조선 청년을 유명하게 만든 '아리따'". 이 문화예술을 공주 '이삼평을 돋보이게 계승, 발전 만이 - 공주시가 앞장서야 할 책무'가 다분히 있음을 이번 체험을 통하여 알았다. 새로운 인식과 착오를 없애는 유일함도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 다짐해 봤다. 공주 제20기고도육성아카데미 서정석교수님과 동행은 숨겨진 숨어지낸 과학 철학을 만나는 시간, 제20기 고도육성아카데미의 참맛을 느끼는고마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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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행복하려면 바로 행복연습을 해보자 [박영희][박영희(오른쪽)나사렛연구소장.]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만 행복이라는게 마음먹은대로 쉽게 되는 것이 아니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복은 막연한 것 이라든가. 아니면 행복은 자기 마음속에서 느끼는 것 이라든가. 그런 수식어로 대충 마무리 하고 살아가는 듯 하다. 열심히 일을 하고 가족을 위해 참고 친구를 위해서 배려하는 것 등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향해 가는 것이며 하나의 줄처럼 연결되어 있는데도 그렇게 많이 행복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으려 한다. 삶이란 '대체로 그런거야' 하는 부모님이나 선배들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대로 삶을 살아가는 현대 사람들은 어느덧 OECD 국가 중에서 자살 1위국이라는 오명을 갖게 되었다. 요즈음 거리나 유원지에서 심심찮게 만나는 자살방지 현수막을 보고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우울감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사회학자는 현대인들을 표현하기를 '마치 마라톤 경기장에서 이미 정지선이 끝났는데도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 것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동하면서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오는 형국이었다. 경제발전과 대량생산이라는 미명아래 사람이 돈보다 아래에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사람들이 지녀야 하는 인간적인 가치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전쟁을 치른 가난한 나라였기에 피할 수 없는 상황이였는지도 모른다. 자원도 많지 않은 나라에서 오로지 배 고프지 않고 잘 살아야 한다는 목표아래 친구도 부모도 심지어 배우자까지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성경에 보면 '해 아래서는 새 것이 없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지금 혹독하게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것도 너무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미 먼저 세상을 살다 간 선배들이 고난을 이겨내는 지혜로운 지침을 만들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그것을 그냥 따라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유치환의 '행복'이라는 시를 보면 답이 나와 있다. "사랑을 주는 것은 사랑받는 것 보다 행복하나리라." 이 말은 진리이다. 진리는 변할 수 없기 때문에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상대를 배려하고 사랑한다면 나의 행복은 덤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지금부터라도 바로 행복연습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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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 사진 한장이 주는 의미는? [서상억][백제계산공주 콘텐츠 활용방안 세미나 모습. 사진=서상억.] 이 사진 한장이 주는 의미는? 이미 부여는계산이 엄청빠르다. 2023년 대백제전에 대비라도 하듯 의자왕 삼천궁녀백제향로 이어서결국엔 계산공주 라는신드롬을 낳는 세미나에 전재산을 걸었음이 아닌가. 훌륭한분들잔치에 끼어든 한장의 사진이 부끄럽다 못해 억울하다. 공주는 뭘 가지고 대백제전에 빛을낼까. 공주시가 내놀만한게 있는게 있다하니 더이상은기다리게 하지말자. 무령왕을 더 이상 잠재우게한다면 부여가 시가 되고 공주가 세종시 관할구가 될 우려가 높지않겠는가하는 시각도 만만치는않다. 그러나 아직은 늦지 않았다. [주]백제문화예술방송축제제작사에서 2023년대백제전을 향한 TV사극드라마 16부작 <무령 꽃피는사비>1400년대조선초 배경으로 픽션사극<조선깡패>2부작 [사비검] 벌써 3편을 시나리오 대본 수년간 준비 물망에 오른<정준호ㆍ김성령ㆍ이경영ㆍ차화연ㆍ김민종ㆍ신현준ㆍ탁재훈ㆍ김흥국ㆍ등 주연급캐스팅만 남겨논 상태다. 공주시가 심도있게 해석만이 기다릴 뿐이다. 68회백제문화제 주무대한 귀퉁에서 대적할만한 콘텐츠를열겠다고 이글에 종지부를 찍는다. 조선과 백제를 넘나드는 첨단뮤지컬<조선깡패가 아뢰는무령꽃>을 주제로 하는 콘서트를 연다. 몇 줄 안되는계산공주의 이슈가 세계를 뒤흔들어 대는콘텐츠가 환영 잔치에 자부심을 갖는 부여를 보고 공주는 이제 더 이상 그 훌륭함을 감추는게 예의가 아니라한다 '검은신이요 백성이라 만인을 안으라 품으라' 백성이 나라 다하는 줄거리, 20기 고도육성아카데미여서 이번 백제문화제때에 뭔가를 보여줘야하지않을까 조심스레 이글을 써본다.[20기 회장 서상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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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계를 넘어 [최진석][(사)새말새몸짓 이사장 최진석] 새로워져야 할 때, 새로워지지 않으면 현재 가지고 있는 새로움 정도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급속하게 더 낡아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한 단계 도약해야 할 때 도약하지 못하면 지금 수준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급속한 하강을 하게 되는 것 또한 세상의 이치다. 우리는 지금 답답한 처지에 있다. 중진국 함정이라고도 한다. 말레이시아, 태국, 브라질,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나 칠레도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대표적 사례다. 우리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말들이 있어 온 지 오래다. 2013년 한국 경제를 끓는 냄비 속 개구리에 비유하면서 한국의 침체와 하락 가능성에 경종을 울렸던 컨설팅 업체 맥킨지가 2018년에 한국 경제가 더 나빠졌다고 재차 경고했다. "한국 경제는 여전히 물이 끓는 냄비 속 개구리 상태다. 5년 전보다 물 온도는 더 올라갔다." 나는 이 말속에서 날카로움도 읽지만 조롱도 발견한다. 이런 조롱을 받을 나라는 아니었다.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세계에서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표현하면서 박수를 보내주던 일이 그리 오래전도 아니다. 현대사에서 '한강의 기적'을 말할 때, 독일이 이룩한 '라인강의 기적'도 함께 말하지만, '기적'이라면 '한강의 기적'만이 기적이다. 독일의 그것은 있다가 없어진 것을 회복한 것이지만, 우리는 없던 것을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적을 이룬 나라고, 기적을 이룬 국민이다. 이런 기적을 이룬 나라는 사실상 인류 현대사에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식민지 시절을 보내다 독립해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룬 나라가 대한민국 외에는 없다. 정치 발전과 경제 발전을 동시에 이룬 유일한 나라다. 원조받던 국가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탈바꿈한 것도 우리가 유일하다. 자원과 기초적인 물적 토대 없이 이 정도의 발전을 이룬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해냈다. 다른 나라들은 모두 식민지 착취를 통해 발전의 토대를 갖췄지만, 우리는 외부의 착취 없이 우리만의 힘으로 이룬 것이니 발전의 내용 또한 다른 나라와 비교하자면 더 도덕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높이는 딱 여기까지라는 점이다. 끓는 냄비 속에 있으면서도 뜨거워지는 줄을 모르는 형국이다. 기적을 이룰 정도로 그렇게 근골을 잘 사용하고 영특하던 우리가 끓는 냄비 속에 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무지 속으로 빠져버렸다. 우리는 한계에 갇혔다. 따라 하기의 종속성 우리를 한계에 가둘 정도로 몸에 밴 익숙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따라 하기'라고 표현할 수 있는 '종속성'이다. 해방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룬 발전과 번영은 이 '따라하기'의 속도와 효율성이 빚어낸 결과다. 우리는 물건을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돈을 벌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기 시작한 것을 들여와 만들어 돈을 벌었다. 우리가 만든 제도로 우리 삶을 제어하고 북돋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제도를 들여와 우리 삶을 거기에 맞췄다. 우리가 독립적으로 한 생각으로 우리의 세계관을 삼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철학을 우리의 비전으로 하며 살았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이룬 발전과 번영의 속살이다. 이 일을 세계 유례없이 잘 해냈다. 그러나 '따라하기'로 살 수 있는 높이는 여기까지다. 따라하기에 습관이 되면 삶의 태도와 사유 구조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종속적인 삶을 살기 쉽다. 그렇게 되면 이익보다는 명분에 집착하고, 지적이기보다는 감각적이고, 실재보다는 도덕에 빠지며, 본질보다는 기능에 집중한다. 명분과 도덕은 정해진 기준을 수행하는 일이므로 과거의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태도에서는 미래를 여는 도전보다는 과거를 헤집는 일에 빠진다. 당연히 이미 알고 있는 것이나 믿고 있는 것만을 수행하려 들지, 그것들을 바꿔 새로움을 기약하는 혁신적 도전에 나서지 못한다. 사회가 멈추고 썩기 시작하는 이유다. 새로워져야 할 때 새로워지지 못하면, 썩는다. 도약해야 할 때 도약하지 못하면, 하강한다. 우리는 조선 말기에 이미 경험했다.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다급한 이유는 조선 말기 다산 선생의 이 절절한 경고가 지금 우리에게 어느 하나 어긋남 없이 해당되기 때문이다. 국가 단계의 높이에서 통치력을 행사했던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 마지막이다. 김대중 대통령 이후의 통치력은 감성적 민족주의에 매몰되거나 권위주의적 시대가 남긴 탐욕과 특권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과거의 운동권 이념을 넘어서지 못한 상태에서 반대쪽 진영을 부정하려는 기능적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정도 이상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이명박과 노무현 사이나 박근혜와 문재인 사이에 있는 수평적 차이를 수직적 차이로 착각하지 말자. 높이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 같은 높이에서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을 뿐이다.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로 시작한 진영이 이젠 "이건 나라냐"라는 말을 듣는다. "이게 나라냐"라고 주장한 쪽과 "이건 나라냐"라고 주장한 쪽 사이가 얼마나 멀까? 4대강 보를 만든 쪽과 허무는 쪽 사이는 또 얼마나 멀까? 같은 높이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방송 장악은 어느 정권에서나 똑같다. 안하무인의 인사, 어용 기자들의 득세, 표현의 자유 억압, 불통, 협치 실종, 권력의 청와대 집중, 낙하산 인사, 블랙리스트 등은 어느 정권에서나 모두 나타났다. 다름이 없다. 같은 높이에 있으면서는 사실 다르기가 더 어렵다. 다름이 없는 이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아무리 다르다고 각자 주장해도 모든 진영이 실제로는 같은 높이의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도전 이제 한계를 뚫고 올라서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점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자. 즉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으로는 이미 할 일을 다 해버린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도달할 그 높이에 이르는 도전 이외에는 가져야 할 사명도 달리 없다. 중진국의 한계에 이른 우리는 이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도전에 나서야 한다. 전술적 차원에서의 사고를 전략적 차원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 대답에 익숙한 지적 활동성을 질문을 시도하는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 건국 세력이 산업화 세력에 의해 도태되고, 산업화 세력이 민주화 세력에 밀려나는 과격한 운동을 통해서 우리의 역사가 진보했듯이 이제는 민주화 세력도 도태되어야 한다. 민주화 세력도 이미 구세력이다. 민주화 세력을 도태시킬 새로운 세력의 형성을 도모해야 한다. 당연히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삶의 태도가 필요해진 이유다. '따라하기'로 갈 수 있는 최고점까지 왔으니 '따라하기'가 아닌 방법으로만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 다른 결과는 다른 방법으로만 얻을 수 있다. 다른 결과를 기대하며 방법과 태도를 바꾸는 것을 혁신이라고 하지 않은가. 그런데 전략적이고 선진국적인 높이로 상승하는 일이 가능하기는 한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문명의 패러다임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상황에서라면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1820년 대분기(Great Divergence) 이후에 후진국과 선진국 사이의 교체는 없었다. 이 말은 한 번 후진국은 계속 후진국에 머물기 쉽고, 한 번 선진국은 계속 선진국이기 쉽다는 말이다. 각 단계를 결정하는 높이의 시선에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축복이 왔다. 바로 몇백 년 계속되던 패러다임이 깨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기존의 패러다임에 균열이 생기고 틈이 생긴 것이다. 후발 주자들이 자신의 단계를 뛰어넘어 한 단계 더 상승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기존의 패러다임이 깨져야 하는데 우리의 국력이 가장 강해진 지금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문제는 우리가 그 축복을 직시하고 있는가의 여부와 그 축복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가의 여부다. 애석하게도 아직까지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본질보다는 기능, 실재보다는 도덕, 이익보다는 명분, 질문보다는 대답에 더 비중을 두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시선이 항상 미래보다는 과거를 향해 있다. 미래를 여는 도전보다는 먼저 과거를 한 점 오차 없이 헤집는 일을 해야 더 진실하게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도록 훈련되었다. '따라하기'에 익숙해지면 결국 미래보다 과거를 더 중시하게 되는 심리를 갖게 된다. 입으로는 미래를 말하지만 사실은 과거를 산다. 그래서 과거의 규정으로 미래의 전개를 제어한다. 과거에 정해진 규제로 있어 본 적이 없던 미래의 변화를 제어하는 일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빅데이터 시대에 데이터를 모으지 못한다. 초융합 연결의 시대에 원격 의료를 막는다. 4차 산업혁명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인 공유경제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이것은 과거로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우리가 훈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일어나는 문명적인 혁명의 시기에도 과거로 과거로만 계속 회귀하려 한다. 낡은 문법을 버리자 이 절박한 시점에 삶의 방식이나 태도가 전면적이고도 근본적인 각성을 통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각성이 없으면 여기까지만 살다 가지 이 이상의 삶을 누리지는 못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후손들에게 영광이 아니라 치욕을 물려줄 수도 있다. 진영 지키기에 빠진 우물 안 개구리들은 역사의 열차에서 내려야 한다. 낡은 문법을 지키는 투사들은 이제 필요 없다. 차라리 경쾌한 도전에 나서는 젊은 무모함이 더 의미 있다. 우리가 어떻게 생존해 온 민족인데, 우리가 어떻게 되찾아 어떻게 발전시킨 나라인데, 여기까지만 살다 가도 괜찮겠는가? 낡은 문법과 결별해 새로운 문법으로 무장하고 새로운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밖에 없다. "부질없다, 부질없다. 정해진 모든 것.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모든 언어들, 모든 생각들. 백설의 새 바탕에 새 이야기 새로 쓰세. 새 세상 여는 일 말고 그 무엇 무거우랴. 새 말 새 몸짓으로 새 세상 열어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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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쭈그러진 심장을 펼 수 있을까요? [최진석][최진석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 우선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는 하나의 낭만적 명제가 아닙니다. 나를 아는 것이 모든 위대함을 실현하는 근본이기에 중요한 겁니다. 돈키호테는 산초가 섬을 다스리러 갈 때 세 가지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 둘째, 네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셋째, 관대해야 한다.” 모든 도덕적-윤리적 결단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여럿 중의 하나로 존재하는 한 우리는 지적 창의도 예술적 모험도 불가능하지요. 내가 누구인지부터 알라는 말은 현실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근본을 바로잡아 현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힘을 기르라는 의미지요. 심장은 왜 쭈그러질까요? 내 눈으로 나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믿지 않고,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 나를 비교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내가 기준이 되어야 삶의 만족도도 높아지고 현실에서의 성취도 커집니다. 외부의 것과 비교하거나 외부의 것을 추종하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주머니 속 체스 말에 불과합니다. 그건 곧 죽은 거예요.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볼 때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쭈그러진 심장도 쫙 펼 수 있겠지요. 돈키호테의 미친 정신을 망가뜨린 사람이 누군가요? 카라스코 학사입니다. 그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에요. 공부를 많이 했다는 건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되는 것을 더 많이 했다는 의미입니다. 바라는 것보다 해야 되는 것을 더 많이 했다는 의미입니다. 바라는 것보다 바람직한 것을 더 많이 알고, 좋아하는 것보다 좋은 것을 더 많이 아는 사람이지요. 저는 세르반테스가 의도를 가지고 학사를 배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정해진 윤리, 정해진 논리, 정해진 가치 규범으로 돈키호테를 다시 고향으로 끌고 들어왔어요. 돈키호테가 자기 자신일 때는 전부 미쳤다고 하더니 다수의 가치관을 따르자 다들 정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돈키호테는 어떻게 됐나요? 죽었어요. 나로 살다가 우리가 되는 순간 죽어버렸습니다. 나로 미쳐서는 생기발랄한 모험을 멈추지 않았는데, 끌려와 다시 우리 안에 집어 넣어진 순간 그는 죽었습니다. 돌아온 돈키호테를 보며 주위 사람들은 박수를 쳤습니다. 돈키호테가 자신에게 박수를 친 게 아니에요. 우리 모두 돈키호테처럼 죽지 않도록 “쭈그러진 심장을 쫙 폅시다.” 최진석,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열림원, 2022), 24~26쪽. “쭈그러진 심장부터 쫙 펴십시오. 그러면 나쁜 운수도 부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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