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뉴스목록
-
[기자수첩] 고군분투하는 삶, 과연 행복일까[오명규기자/편집국장] "고군분투 하렵니다. 진심다해 노년의 아름다움, 채움하렵니다" 라며 인생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한 신중년의 소녀에게서 톡을 받고 '고분분투하는 삶'에 대해 천착해 봤다. 고군분투(孤軍奮鬪)란 사전적으로 보면 "적은 인원이나 약한 힘으로 남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고 힘에 벅찬 일을 잘해내다"이다. 어느 선지자는 고분분투하는 삶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깊이 생각해 봤다. 삶은 고통이다. 소수의 천재들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겠지만 실상 그런 사람들도 필시 숱한 고통을 겪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 일반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늘 해쳐나가야 하는 일들 투성이며, 그렇지 않으면 나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뒤로 한 걸음, 두 걸음 후진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을 역행해서 올라가는 것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물리적으로도 위에 있는 물체는 아래로 떨어지려 하기 마련이고, 이를 다시 위로 올리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가만히 있으면 아래로 떨어질 뿐이며 이를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행복은 '무탈함이 이어지는 상태'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언뜻 욕심을 버리는 삶, 고군분투하지 않는 삶을 의미하는 것응로 보이며, 고군분투하는 삶과 멀어져도 괜찮다는 뜻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이 무탈함이라는 것도 나아가기 위한 고통의 걸음이 없다면 지속될 수 없다. 결국 사회에 던져저 고군분투 하는 일상으로 우리는 그저 자리를 지키거나 작게나마 진일보를 이루는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고통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삶을 산다. 하지만 고통인 삶은 행복할 수 있다. 고통 속에서 이루어낸 발전들,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지켜내고 싶었던 사람들은 고군분투하는 삶에 행복을 준다. 오히려 숱한 고통을 느끼고 난 이후에 마주하는 나의 가치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깨닫고, 이를 통해 행복을 느낀다. 물론 정도가 지나친 고통들, 혹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 고통은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 그렇지만 이를 통해 이루어낸 것이 있다면, 혹은 이를 통해 지켜내는 것들이 있다면 우리는 고통 속에서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 하지만 선지자의 주장처럼 세상은 그리 녹록치만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고군분투해야 하는 삶이 숙명이라 한다면 "그래, 디스트레스 고통이 아닌 유스트레스의 행복함속에서 고군분투하며 배움으로 채워가는 위인지학 위기지학의 아름다운 세상의 삶을 찾아 나서자" 이렇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 까. 이렇듯 모두가 고군분투하는 인생의 삶 속에서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행복의 기차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고군분투하는 삶이 과연 행복일까'를 생각해 봤다.
-
[기자수첩] 기다리는 행복한 기도[오명규 기자/편집국장] 코로나 시대 일상의 회복을 기다려 왔고 또 기다린다. 그러면서 기다림의 시간은 강물처럼 세월따라 흘러가고 있다. 오늘은 문득 흐르는 세월 속에 '기다리고 기다림은 곧 행복일까'하는 생각에 '기다리는 행복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2017년 12월 이해인 수녀. 그녀는 '기다리는 행복'을 펴내며 일상의 기다림이 곧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언제나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삶!', '기다림'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설렘과 그리움을 사랑한다" 며 "여기까지 온 세월의 선물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광안리 수도원에서 살아온 지난 반세기를 새롭게 감사하며 또 한 권의 책 '기다리는 행복'을 펴낼 수 있어 행복하다"고 전했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인 그녀는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받은 세례명은 '벨라뎃다', 스무 살 수녀원에 입회해 첫 서원 때 받은 수도명은 '클라우디아'다. '넓고 어진 바다 마음으로 살고 싶다'는 그 뜻처럼 부산의 광안리 바닷가 수녀원의 '해인글방'에서 한결같이 '사랑과 위로'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고 있다. “기다리는 행복”은 총 6부로 '일상의 행복', '오늘의 행복', '고해소에서', '기다리는 행복', '흰 구름 러브레터', '처음의 마음-기도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한 동안 기자는 이해인 수녀만의 감성으로 집필한 '기다리는 행복'을 읽고 또 읽으며 행복한 일상을 매일 매일 꿈꾸며 기다려 왔다. 지금도 행복한 삶을 소망하며 행복한 하루, 기도로 시작하며 기다리고 있다. 그녀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 그리고 솔직하고 담백한 표현들은 나의 삶에 큰 공감을 주었고 감동받기에 충분하였다. 구름소녀(이해인 수녀의 별칭)가 투병생활을 하며 어려움을 견디던 그때, 그녀의 그 기도문는 지금도 내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구름소녀의 기도다. "내가 온전히 완치 판정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착한 환자'로 잘 참고 버티어주었다며 주치의가 2013년에 선물로 건네준 '5년 생존컵'을 오며 가며 바라보면 새삼 반가운 마음입니다. 그 컵을 앞에 놓고 오늘은 이렇게 기도해봅니다. ‘이 순간 제가 살아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아직은 아픔을 안고 걸어야 할 삶의 여정에서 힘들어도 선과 미소와 평화를 잃지 않는 환자로 살고 싶습니다. 세상의 많은 환우와 연대하며 고통 중에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도자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가능하다면 끝까지 겸손과 인내의 산으로 올라 환히 웃을 수 있는 승리의 복녀가 될 수 있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2018년 공주시의 올해의 책으로 이해인 수녀의 '기다리는 행복'이 선정돼 당시 공주시립도서관장이던 기자는 부산 광안리 수도원의 '해인글방'을 찾아 수녀에게 올해의 책 인증서를 전달했다.] ‘기다리는 행복’은 기자가 도서관장 시절 충남 공주시의 책읽기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한 시민과 함께 읽을 책 중 한 책이다. 당시 기다리는 행복의 기차를 타고 오송역에서 부산으로 향한 기억은, 그 추억 속의 구름소녀는 아직도 기억 속에서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또렷하다. 구름수녀-이해인 수녀님을 만난다는 '설레임은 곧 기다리는 행복'이었다. 만남의 약속 날짜를 잡고 괜시리 기쁜 마음 들떠 기다리던 시간들, 그날 구름소녀님이 '선물 줘야지" 하며 건넨 친필 사인 명함이며 주옥같은 시인의 시엽서등 그리고 어깨걸이용 가방선물을 메고 '손잡아요' 하며 함께 걷던 해인글방 앞 정원의 아름다운 시간들은 지금도 마음 깊숙한 곳에 아름답게 담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반갑고 고마웠고 설레었던 그날의 그리움을 다시 인사와 함께 전한다. 코로나 시대, 오늘도 모두의 건강한 일상이, 행복이길 소망하며, '기다리고 기다림은 곧 행복일까'를 생각하며 어디선가 힘든생활로 일상의 행복을 소망하고 있을 한 아름다운 천사을 생각하며 '기다리는 행복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해 봤다. 아름답던 시간에 동행해 고맙게 읽어 준 독자와 세상에 구름소녀의 '기다림의 행복 - 사랑의 인사'법을 선물한다. "온 생애를 두고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수수한 옷차림의 기다림입니다 /겨울 항아리에 담긴 포도주처럼 나의 언어를 익혀/ 내 복된 삶의 즙을 짜겠습니다/ 밀물이 오면 썰물을 꽃이 지면 열매를/ 어둠이 구워 내는 빛을 기다리며 살겠습니다/ 나의 친구여/ 당신이 잃어버린 나를 만나러/ 더 이상 먼 곳을 헤매지 마십시오/ 내가 길들인 기다림의 일상속에 머무는 나/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오랜 나날 상처 받고도 죽지 않는 기다림/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나의 소임입니다." [기다리는 행복-이해인 수녀가 건네는 사랑의 인사.]
-
[기고] 행복하려면 바로 행복연습을 해보자 [박영희][박영희(오른쪽)나사렛연구소장.]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만 행복이라는게 마음먹은대로 쉽게 되는 것이 아니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복은 막연한 것 이라든가. 아니면 행복은 자기 마음속에서 느끼는 것 이라든가. 그런 수식어로 대충 마무리 하고 살아가는 듯 하다. 열심히 일을 하고 가족을 위해 참고 친구를 위해서 배려하는 것 등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향해 가는 것이며 하나의 줄처럼 연결되어 있는데도 그렇게 많이 행복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으려 한다. 삶이란 '대체로 그런거야' 하는 부모님이나 선배들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대로 삶을 살아가는 현대 사람들은 어느덧 OECD 국가 중에서 자살 1위국이라는 오명을 갖게 되었다. 요즈음 거리나 유원지에서 심심찮게 만나는 자살방지 현수막을 보고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우울감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사회학자는 현대인들을 표현하기를 '마치 마라톤 경기장에서 이미 정지선이 끝났는데도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 것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동하면서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오는 형국이었다. 경제발전과 대량생산이라는 미명아래 사람이 돈보다 아래에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사람들이 지녀야 하는 인간적인 가치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전쟁을 치른 가난한 나라였기에 피할 수 없는 상황이였는지도 모른다. 자원도 많지 않은 나라에서 오로지 배 고프지 않고 잘 살아야 한다는 목표아래 친구도 부모도 심지어 배우자까지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성경에 보면 '해 아래서는 새 것이 없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지금 혹독하게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것도 너무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미 먼저 세상을 살다 간 선배들이 고난을 이겨내는 지혜로운 지침을 만들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그것을 그냥 따라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유치환의 '행복'이라는 시를 보면 답이 나와 있다. "사랑을 주는 것은 사랑받는 것 보다 행복하나리라." 이 말은 진리이다. 진리는 변할 수 없기 때문에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상대를 배려하고 사랑한다면 나의 행복은 덤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지금부터라도 바로 행복연습을 해보자.
-
[기고] 이 사진 한장이 주는 의미는? [서상억][백제계산공주 콘텐츠 활용방안 세미나 모습. 사진=서상억.] 이 사진 한장이 주는 의미는? 이미 부여는계산이 엄청빠르다. 2023년 대백제전에 대비라도 하듯 의자왕 삼천궁녀백제향로 이어서결국엔 계산공주 라는신드롬을 낳는 세미나에 전재산을 걸었음이 아닌가. 훌륭한분들잔치에 끼어든 한장의 사진이 부끄럽다 못해 억울하다. 공주는 뭘 가지고 대백제전에 빛을낼까. 공주시가 내놀만한게 있는게 있다하니 더이상은기다리게 하지말자. 무령왕을 더 이상 잠재우게한다면 부여가 시가 되고 공주가 세종시 관할구가 될 우려가 높지않겠는가하는 시각도 만만치는않다. 그러나 아직은 늦지 않았다. [주]백제문화예술방송축제제작사에서 2023년대백제전을 향한 TV사극드라마 16부작 <무령 꽃피는사비>1400년대조선초 배경으로 픽션사극<조선깡패>2부작 [사비검] 벌써 3편을 시나리오 대본 수년간 준비 물망에 오른<정준호ㆍ김성령ㆍ이경영ㆍ차화연ㆍ김민종ㆍ신현준ㆍ탁재훈ㆍ김흥국ㆍ등 주연급캐스팅만 남겨논 상태다. 공주시가 심도있게 해석만이 기다릴 뿐이다. 68회백제문화제 주무대한 귀퉁에서 대적할만한 콘텐츠를열겠다고 이글에 종지부를 찍는다. 조선과 백제를 넘나드는 첨단뮤지컬<조선깡패가 아뢰는무령꽃>을 주제로 하는 콘서트를 연다. 몇 줄 안되는계산공주의 이슈가 세계를 뒤흔들어 대는콘텐츠가 환영 잔치에 자부심을 갖는 부여를 보고 공주는 이제 더 이상 그 훌륭함을 감추는게 예의가 아니라한다 '검은신이요 백성이라 만인을 안으라 품으라' 백성이 나라 다하는 줄거리, 20기 고도육성아카데미여서 이번 백제문화제때에 뭔가를 보여줘야하지않을까 조심스레 이글을 써본다.[20기 회장 서상억]
-
[칼럼] "한 마리이긴 하지. 하지만 사자야" [최진석]인간은 건너가는 존재다. 건너가려는 자는 멈추지 않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러니 당연히 여행에 인간의 속성이 제일 많이 담겨있다. 여행은 빈틈없이 치밀하고 꽉 찬 자신에게 일부러 빈틈을 만들고, 공간을 허용하고, 정해진 의미들을 털어내고, 시간을 낭비하는 척하면서 스스로 흔들리게 한다. 질문은 여행이고 대답은 멈추기다. 문명의 주도권은 질문하는 자가 쥔다. 대답은 논증과 논변의 형태이고, 질문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의 형태다. 이야기하는 자가 질문하는 자다. 문명의 주인 자리는 논증하거나 논변하거나 자잘하게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 크게 이야기하는 자가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어쩌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지면 여행을 떠나라. 자신만의 이야기가 잘 건설되지 않아도 여행을 떠나보라. 끊임없는 건너가기로 자신의 공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완성의 길이라면, 이 여정은 필연적으로 이야기의 형식을 띠지 않을 수 없다. 논증이나 논변에 빠진 자는 크기가 작다. 더 커지고 싶은 자는 이야기를 한다. 논증이나 논변에는 여백이 없다. 오죽하면 논문 심사받는 태도를 방어(defence)라고 할까. 논문은 어쩔 수 없이 공격과 방어의 현장에서 선명하게 존재한다. 빈틈이 있으면 바로 패배하는 것이 논변의 운명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오히려 빈틈을 생명으로 해서 산다. 이야기에서의 빈틈은 소비되거나 낭비되는 공간이 아니라, 더욱 생명력 있는 율동감을 만들어내는 생산적 공간이 된다. 이야기를 듣던 자들은 이 빈틈으로 자신도 몰래 스며들어 이야기에 참여하며 결국에는 이야기의 공동 생산자로 이름을 올린다. 감동의 공유와 폭이 커진다는 말이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사실을 증명한 논문을 수백 편 읽어도 거짓말을 끊기는 어렵다. 차라리 피노키오의 이야기책을 제대로 한 번 읽으면 거짓말을 당장 끊을 수도 있다. 빈틈이 만들어내는 참여의 공간 때문이다. 이 공간에 한번 들면 감동의 파장을 피하기가 어렵다. 논증이나 논변에서 상대방은 성 밖의 존재가 되지만, 이야기에서는 성 내의 존재다. 같은 성 내에 사는 사람들끼리는 아무래도 성 밖의 사람들보다 더 친하게 지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여 감동은 논문보다는 이야기 안에서 더욱 쉽게 발견된다. 이야기는 아버지보다는 주로 할머니에게서 많이 나왔다. 아버지는 옳거나 쓸모있는 말씀을 주로 대낮에 하셨고, 할머니는 쓸모없이 재밌기만 한 이야기를 주로 밤에 많이 해주셨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조금씩 달랐다. 이야기꾼은 아무리 있는 것을 그대로 되풀이하더라도 생산자의 속성을 아예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듣는 자도 사실은 이야기하는 자가 베풀어놓은 빈틈으로 스며들어 참여자가 되는 관계로 생산자의 역할까지도 공유한다. 그래서 들을 때마다 이야기가 달라지기도 한다. 하는 자도 할 때마다 달리 하고 듣는 자도 들을 때마다 달리 듣는 이야기의 변주에는 한계가 없다. 이야기의 변주를 따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많은 모양과 색깔을 갖게 된다. 이솝은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꾼이다.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야기꾼은 그리 많지 않은데, 이솝은 참 특별하다. 그의 이야기는 가끔 달리 들리기도 한다. 어렸을 때, 나는 「시골 쥐와 도시 쥐」 이야기를 읽고 고통 속에서 풍족하게 살기보다는 부족하더라도 마음 편하게 사는 편이 더 낫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번에 읽을 때는 달랐다. 들판에서 겨우 보리와 곡식을 먹을 수 있을 뿐인 시골 쥐를 짠하게 여긴 도시 쥐가 치즈와 꿀과 무화과 등이 풍부하게 있는 도시로 시골 쥐를 데리고 갔다. 하지만 그 풍성한 먹을거리를 먹으려 할 때마다 사람들이 갑자기 들어와서 놀라는 바람에 편히 먹을 수가 없었다. 시골 쥐는 “자네나 배 터지게 먹으며 큰 즐거움을 누리시게나. 많은 위험과 두려움을 감수하면서 말일세! 그런데 그것이 싫은 사람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아무 두려움 없이 보리와 곡식을 갉아먹으며 살아갈 것이네.”라고 말하며 시골로 돌아간다. 이전에는 가난하더라도 맘 편한 것이 제일이다는 교훈을 얻곤 했는데, 이번에는 풍요를 누리려면 그에 합당한 수고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으로 새롭게 읽혔다. “큰 즐거움”은 “많은 위험과 두려움을 감수”하지 않으면 얻어지지 않는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 어떤 수고도 하지 않으려는 시골 쥐와 큰 즐거움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은 도시 쥐 사이에서 이동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네 삶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 이쪽과 저쪽 사이를 흔들리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논증이나 논변에 빠진 자들은 언제나 이미 있는 것들의 진위나 선악을 다투는 일로 바쁘다. 여기서는 무게중심이 이미 있는 것들로 조금 더 기울어 있다. 이와 달리, 이야기는 빈틈 사이로 열려있어서 이미 있는 것들보다는 앞으로 올 것에 관심을 더 둔다. 여기서는 무게중심이 이미 있는 것들보다는 앞으로 올 것을 초청하는 이야기꾼 자신에게 더 있다. 지식의 영역에도 수입자가 있고 생산자가 있다고 할 때, 생산의 순간은 논증이 아니라 이야기로 일어난다. 그래서 생산의 공간이 허용되는 이야기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여백을 채우고 감동을 확장시킨다. 논변은 이야기를 수습할 뿐이다. 이야기꾼은 자신의 호기심에 따라 이야기를 부리는 자다. 이야기꾼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에 더 가깝다. 질문하는 자가 대답하는 자보다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것과 같은 이치다. 감동을 생산할 수 있다면 그는 큰 사람이다. 독수리가 날아 내려와서 새끼 양 한 마리를 채가는 것을 보고 갈까마귀가 자기도 한 번 해보려고 “숫양을 내리 덮쳤다. 하지만 숫양의 푹신푹신한 털에 발톱이 박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발톱을 빼내 도망칠 수가 없었다.” 목자는 갈까마귀를 그대로 잡아서 집으로 가져갔다. “아이들이 이 새가 무슨 새냐고 묻자” 목자가 말했다. “이 새는 갈까마귀가 분명한데 독수리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구나.” 누구나 자기가 되려 하지 않으면 삶은 늪에 빠진다. 그래서 자신을 아는 것이 그만큼 중요해지는 것이다. 자기를 향해 걷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도 없지만 그에 합당한 수고와 위험을 감수하기만 하면 거기서 오는 성취와 즐거움은 가장 크다. 자기를 향해 걷지 않았던 갈까마귀는 결국 죽음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자기를 향해 걷지 않고 타인을 향해 걸어 갈까마귀만큼 험한 최후를 맞는 여우 이야기도 있다. 여우는 자기보다도 훨씬 더 큰 “뱀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서 그 긴 모습이” 부러운 나머지 “뱀과 똑같이 되고 싶어서 옆에 누워 자신의 몸을 길게 늘이려고 시도”하다가 “몸이 찢어져 버리고 말았다.” 자기를 향해 걷지 않은 자는 누가 되었든 그 정도에 따라 해를 입는다. 심하면 몸이 찢어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먹을거리가 되기도 한다. 자기를 향해 걷는 길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걸으면 죽음은 면하더라도 얼마든지 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 사자의 모습을 부러워하던 당나귀가 “사자 가죽을 둘러쓰고서 사자 행세를” 하다가 “바람이 불어와 사자 가죽이 벗겨져 날아가 버리자 당나귀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러자 모두가 달려들어 막대기와 몽둥이로 당나귀를 때렸다.” 사자 가죽을 뒤집어쓰지만 않았으면, 당나귀는 망신을 당할 일이 없었다. 사자를 부러워하는 당나귀의 내면은 참 초라하다. 자기를 향해 걷지 않은 내면이기 때문이다. 이야기하는 자는 크다. 이야기꾼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 아니겠는가. 자주 이야기하고 들으면 사람은 커진다. 자기를 향해 걷는 자는 클 수밖에 없다. 이야기하는 자, 질문하는 자, 생산하는 자, 지배하는 자들은 모두 자기를 향해 걷는다. “새끼를 고작 한 마리밖에 못 낳는다며” 여우가 “면박을 주자” 암사자가 조용히 한마디 한다. “한 마리이긴 하지. 하지만 사자야.” 최진석, 「"한 마리이긴 하지. 하지만 사자야"」,『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 열림원, 2022, 259 ~265쪽
-
[기고] 한계를 넘어 [최진석][(사)새말새몸짓 이사장 최진석] 새로워져야 할 때, 새로워지지 않으면 현재 가지고 있는 새로움 정도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급속하게 더 낡아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한 단계 도약해야 할 때 도약하지 못하면 지금 수준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급속한 하강을 하게 되는 것 또한 세상의 이치다. 우리는 지금 답답한 처지에 있다. 중진국 함정이라고도 한다. 말레이시아, 태국, 브라질,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나 칠레도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대표적 사례다. 우리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말들이 있어 온 지 오래다. 2013년 한국 경제를 끓는 냄비 속 개구리에 비유하면서 한국의 침체와 하락 가능성에 경종을 울렸던 컨설팅 업체 맥킨지가 2018년에 한국 경제가 더 나빠졌다고 재차 경고했다. "한국 경제는 여전히 물이 끓는 냄비 속 개구리 상태다. 5년 전보다 물 온도는 더 올라갔다." 나는 이 말속에서 날카로움도 읽지만 조롱도 발견한다. 이런 조롱을 받을 나라는 아니었다.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세계에서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표현하면서 박수를 보내주던 일이 그리 오래전도 아니다. 현대사에서 '한강의 기적'을 말할 때, 독일이 이룩한 '라인강의 기적'도 함께 말하지만, '기적'이라면 '한강의 기적'만이 기적이다. 독일의 그것은 있다가 없어진 것을 회복한 것이지만, 우리는 없던 것을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적을 이룬 나라고, 기적을 이룬 국민이다. 이런 기적을 이룬 나라는 사실상 인류 현대사에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식민지 시절을 보내다 독립해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룬 나라가 대한민국 외에는 없다. 정치 발전과 경제 발전을 동시에 이룬 유일한 나라다. 원조받던 국가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탈바꿈한 것도 우리가 유일하다. 자원과 기초적인 물적 토대 없이 이 정도의 발전을 이룬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해냈다. 다른 나라들은 모두 식민지 착취를 통해 발전의 토대를 갖췄지만, 우리는 외부의 착취 없이 우리만의 힘으로 이룬 것이니 발전의 내용 또한 다른 나라와 비교하자면 더 도덕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높이는 딱 여기까지라는 점이다. 끓는 냄비 속에 있으면서도 뜨거워지는 줄을 모르는 형국이다. 기적을 이룰 정도로 그렇게 근골을 잘 사용하고 영특하던 우리가 끓는 냄비 속에 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무지 속으로 빠져버렸다. 우리는 한계에 갇혔다. 따라 하기의 종속성 우리를 한계에 가둘 정도로 몸에 밴 익숙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따라 하기'라고 표현할 수 있는 '종속성'이다. 해방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룬 발전과 번영은 이 '따라하기'의 속도와 효율성이 빚어낸 결과다. 우리는 물건을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돈을 벌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기 시작한 것을 들여와 만들어 돈을 벌었다. 우리가 만든 제도로 우리 삶을 제어하고 북돋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제도를 들여와 우리 삶을 거기에 맞췄다. 우리가 독립적으로 한 생각으로 우리의 세계관을 삼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철학을 우리의 비전으로 하며 살았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이룬 발전과 번영의 속살이다. 이 일을 세계 유례없이 잘 해냈다. 그러나 '따라하기'로 살 수 있는 높이는 여기까지다. 따라하기에 습관이 되면 삶의 태도와 사유 구조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종속적인 삶을 살기 쉽다. 그렇게 되면 이익보다는 명분에 집착하고, 지적이기보다는 감각적이고, 실재보다는 도덕에 빠지며, 본질보다는 기능에 집중한다. 명분과 도덕은 정해진 기준을 수행하는 일이므로 과거의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태도에서는 미래를 여는 도전보다는 과거를 헤집는 일에 빠진다. 당연히 이미 알고 있는 것이나 믿고 있는 것만을 수행하려 들지, 그것들을 바꿔 새로움을 기약하는 혁신적 도전에 나서지 못한다. 사회가 멈추고 썩기 시작하는 이유다. 새로워져야 할 때 새로워지지 못하면, 썩는다. 도약해야 할 때 도약하지 못하면, 하강한다. 우리는 조선 말기에 이미 경험했다.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다급한 이유는 조선 말기 다산 선생의 이 절절한 경고가 지금 우리에게 어느 하나 어긋남 없이 해당되기 때문이다. 국가 단계의 높이에서 통치력을 행사했던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 마지막이다. 김대중 대통령 이후의 통치력은 감성적 민족주의에 매몰되거나 권위주의적 시대가 남긴 탐욕과 특권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과거의 운동권 이념을 넘어서지 못한 상태에서 반대쪽 진영을 부정하려는 기능적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정도 이상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이명박과 노무현 사이나 박근혜와 문재인 사이에 있는 수평적 차이를 수직적 차이로 착각하지 말자. 높이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 같은 높이에서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을 뿐이다.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로 시작한 진영이 이젠 "이건 나라냐"라는 말을 듣는다. "이게 나라냐"라고 주장한 쪽과 "이건 나라냐"라고 주장한 쪽 사이가 얼마나 멀까? 4대강 보를 만든 쪽과 허무는 쪽 사이는 또 얼마나 멀까? 같은 높이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방송 장악은 어느 정권에서나 똑같다. 안하무인의 인사, 어용 기자들의 득세, 표현의 자유 억압, 불통, 협치 실종, 권력의 청와대 집중, 낙하산 인사, 블랙리스트 등은 어느 정권에서나 모두 나타났다. 다름이 없다. 같은 높이에 있으면서는 사실 다르기가 더 어렵다. 다름이 없는 이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아무리 다르다고 각자 주장해도 모든 진영이 실제로는 같은 높이의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도전 이제 한계를 뚫고 올라서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점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자. 즉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으로는 이미 할 일을 다 해버린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도달할 그 높이에 이르는 도전 이외에는 가져야 할 사명도 달리 없다. 중진국의 한계에 이른 우리는 이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도전에 나서야 한다. 전술적 차원에서의 사고를 전략적 차원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 대답에 익숙한 지적 활동성을 질문을 시도하는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 건국 세력이 산업화 세력에 의해 도태되고, 산업화 세력이 민주화 세력에 밀려나는 과격한 운동을 통해서 우리의 역사가 진보했듯이 이제는 민주화 세력도 도태되어야 한다. 민주화 세력도 이미 구세력이다. 민주화 세력을 도태시킬 새로운 세력의 형성을 도모해야 한다. 당연히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삶의 태도가 필요해진 이유다. '따라하기'로 갈 수 있는 최고점까지 왔으니 '따라하기'가 아닌 방법으로만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 다른 결과는 다른 방법으로만 얻을 수 있다. 다른 결과를 기대하며 방법과 태도를 바꾸는 것을 혁신이라고 하지 않은가. 그런데 전략적이고 선진국적인 높이로 상승하는 일이 가능하기는 한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문명의 패러다임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상황에서라면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1820년 대분기(Great Divergence) 이후에 후진국과 선진국 사이의 교체는 없었다. 이 말은 한 번 후진국은 계속 후진국에 머물기 쉽고, 한 번 선진국은 계속 선진국이기 쉽다는 말이다. 각 단계를 결정하는 높이의 시선에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축복이 왔다. 바로 몇백 년 계속되던 패러다임이 깨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기존의 패러다임에 균열이 생기고 틈이 생긴 것이다. 후발 주자들이 자신의 단계를 뛰어넘어 한 단계 더 상승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기존의 패러다임이 깨져야 하는데 우리의 국력이 가장 강해진 지금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문제는 우리가 그 축복을 직시하고 있는가의 여부와 그 축복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가의 여부다. 애석하게도 아직까지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본질보다는 기능, 실재보다는 도덕, 이익보다는 명분, 질문보다는 대답에 더 비중을 두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시선이 항상 미래보다는 과거를 향해 있다. 미래를 여는 도전보다는 먼저 과거를 한 점 오차 없이 헤집는 일을 해야 더 진실하게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도록 훈련되었다. '따라하기'에 익숙해지면 결국 미래보다 과거를 더 중시하게 되는 심리를 갖게 된다. 입으로는 미래를 말하지만 사실은 과거를 산다. 그래서 과거의 규정으로 미래의 전개를 제어한다. 과거에 정해진 규제로 있어 본 적이 없던 미래의 변화를 제어하는 일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빅데이터 시대에 데이터를 모으지 못한다. 초융합 연결의 시대에 원격 의료를 막는다. 4차 산업혁명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인 공유경제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이것은 과거로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우리가 훈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일어나는 문명적인 혁명의 시기에도 과거로 과거로만 계속 회귀하려 한다. 낡은 문법을 버리자 이 절박한 시점에 삶의 방식이나 태도가 전면적이고도 근본적인 각성을 통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각성이 없으면 여기까지만 살다 가지 이 이상의 삶을 누리지는 못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후손들에게 영광이 아니라 치욕을 물려줄 수도 있다. 진영 지키기에 빠진 우물 안 개구리들은 역사의 열차에서 내려야 한다. 낡은 문법을 지키는 투사들은 이제 필요 없다. 차라리 경쾌한 도전에 나서는 젊은 무모함이 더 의미 있다. 우리가 어떻게 생존해 온 민족인데, 우리가 어떻게 되찾아 어떻게 발전시킨 나라인데, 여기까지만 살다 가도 괜찮겠는가? 낡은 문법과 결별해 새로운 문법으로 무장하고 새로운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밖에 없다. "부질없다, 부질없다. 정해진 모든 것.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모든 언어들, 모든 생각들. 백설의 새 바탕에 새 이야기 새로 쓰세. 새 세상 여는 일 말고 그 무엇 무거우랴. 새 말 새 몸짓으로 새 세상 열어보세."
-
[기자수첩] 오늘 하루를 잘 살면 한해가 풍요롭다.[오명규 기자/편집국장] '하루를 잘 잘면 한해가 풍요롭다'고 한다. 오늘은 내 삶의 하루를 어떻게 하면 잘살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생각에 이르러, '책속에 길'이라는 곳에 머물렀다. 그 마음을 알려면 내 안에 어떤 마음이 존재하는 지 비춰 봐야 한다. '김홍신의 하루 사용설명서' 8월21일. 내 삶을 사랑하는 365가지 방법 - '마음비추어보기' 편에서 정답인 지는 알수는 없지만 나름의 그 해법을 찾아 봤다. 김홍신 작가는 '마음의 숫자를 줄이면 내 마음이 훤히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마음의 숫자를 줄이자..." 곰곰히 생각에 생각을 하나 둘 더 하다가 점점 빠져들었다. 그렇다. 사람의 마음은 한없이 넓어지기도 하지만 또 어느 순간 바늘구멍하나 들어가기 어려울 만큼 좁아져 옹졸한 태도와 행동을 밖으로 표출해 내기도 하고 어느땐 결국 싸움으로 번져 큰 일을 내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두가지 마음의 감정 즉 옳으면서 싫고, 싫으면서 인정하고 행복한 척 해야하는 등의 감정으로 살아가는 현실속의 감정들을 일컬어 '양가감정'이라 부른다. 오늘 문자하나를 받았다. '추석 전 벌초를 잘하는 사람을 사 다 끝냈으니 그리 알라'는 시골 큰집에서의 메시지 였다. '내심 벌초 날 참여해야 한다'는 책무감 속에서 벗어난 듯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바로 '왜, 어떤 연유로 알리지 않고 조상님들의 산소 벌초를 잘하는 사람의 손을 빌려 끝냈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에 이런 저런 감정이 스치며 그간의 많은 일들이 주마둥처럼 스쳐 지나 갔다. 김홍신 작가는 "마음은 본디 모양이 없는 데 사람이 그 모양을 꽃처럼 만들기도 하고 가시철망처럼 만들기도 한다"며 이는 마음이 하나가 아니고 변덕스럽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느낄수 있고 마음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볼수 있다"고 전하며 나뭇잎이 흔들릴 때 바람을 느끼듯, 마음의 숫자를 줄이면 내 마음이 훤이 보인다"라고 전한다. 결국, 나름 풀이해 보면 "이런 양가적 감정들을 선하게 잘 다스리면 사람들은 '마음 착한 사람 만나 좋다'라며 기분 좋게 칭찬하게 된다는 것" 일게댜. 오늘은 '벌초를 다 끝냈으니 걱정 말고 일상에 전념하면 좋겠다'는 큰 형님의 메시지에 '나를 소외시켰구나'는 하는 불만섞은 생각보다 '코로나 시대에 멀리서 모여들 자손들의 불편함을 덜라는 배려였다'고 또 고마운 배려의 마음의 표시였다는 생각에 이르르니 변덕스런 마음에 중심을 다 잡게 되고 한결 고맙고, 편한 마음을 얻게 됐다. 김홍신 작가의 365가지 '내 삶을 사랑하는 하루 사용설명서' 처럼 8월 21일 마음편한 하루, 오늘도 잘 살았다. 그랬으니 온 가족 식구들 그리고 이 나라, 이 지역사회가 더불어 함께 올해도 풍요로운 결실을 맺는 한가위 추석을 맞고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면서 모두가 행복한 한해가 되게 해 달라고 오늘은 간절함으로 기도드려야 겠다.
-
김대중 13주기, 복지 후퇴를 우려한다김정섭 (민선7기 공주시장) 8월 18일은 제15대 김대중 대통령의 13주기 되는 날이다. 김 대통령은 외환위기를 극복한 지도자로 기억되고, 존경하는 인물로도 상위권에 꼽히고 있다. 정치사적으로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야당 후보로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수평적 정권교체를 최초로 이뤄낸 인물로 기록되었다. 그의 서거 이후 다섯 번째 대통령의 취임 100일을 지나고 있다.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낮게 나오다 보니 예전 대통령들이 본보기로 자주 소환되고 있다. 특 히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 시기(1998-2003)는 현재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힘들었던 때였기에 김대중의 리더십에서 배워야 할 점이 적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일 때부터 지방자치제를 부활해냈고, 남북한간 평화협력을 이루기 위해 남북 정상간의 대화를 처음으로 이뤄냈다. 민주화운동과 햇볕정책을 인정받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IT·벤처기업을 육성하고 문화산업의 발전을 이끌어 국부를 늘렸으며, 여성부와 국가인권위원회를 신설하는 등 억눌린 이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서 썼다. 한일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이끄는 등 외교적 역량도 빛을 발했다. 무엇보다도 임기 내에는 절대 어려울 것이라던 IMF 관리체제 극복을 3년 만에 해내고 우리나라를 세계 4위의 외환보유국으로 올려놓고 퇴임한 것이 김대중이다. 한편 김대중 대통령은 임기 내내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책에 집중했다.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복지정책의 도입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였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시행, 의료·연금·고용·산재 등 4대 사회보험의 전면 확대 등으로 보편적 복지국가로 가는 근간을 마련했다. 경제난의 최대 피해자인 서민과 취약계층을 보호, 부양하기 위한 사회안정망을 구축한 것이다. 김대중은 ‘복지는 시혜가 아닌 인권’이라는 철학을 구체적인 정책으로 펼쳐냈다. 갓 100일을 넘긴 윤석열 정부가 교훈을 얻어야 한다면 바로 이 대목이다. 5년 임기의 새 정부가 정부예산을 처음으로 편성하는 이 시기에, 시중에서는 서민과 취약계층 지원 예산이 홀대받지 않을까 걱정이 많다. 정부가 이른바 (부자)감세정책과 함께 “재정 긴축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계속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피해는 가장 낮은 곳에서 나타날 것이 뻔하다. 우선, 지역화폐 국비 지원정책의 폐기 혹은 축소 움직임이다. 서민 물가가 크게 오르고 있고 2년 반 동안 이어진 코로나19로 인한 민생경제 전반의 피해와 위축이 심각한 상황이다. 이런 때 지역화폐에 대한 국비 지원 폐지나 감축은 국민들에게 ‘각자 알아서 살라’는 말과 같다며 ‘부자만을 위한 정부냐’는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둘째, 정부는 재정 효율성을 이유로 노인 공공일자리를 감축하겠다고 한다. 노인일자리는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한국의 노인빈곤율과 노인자살율을 개선하기 위한, 말하자면 복지 일자리이다. 빈약한 연금제도를 보완하면서 노인들의 사회활동을 지원하는 그야말로 효자정책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셋째, 교육과 주거 등 돌봄정책의 뒷걸음질이다. 만 5살 초등학교 조기입학을 의견 수렴과 공론화절차 없이 내놨다가 집어넣은 것이 대표적이다. 국민들의 고달픔을 해결해주는 차원의 교육과 보육, 일자리 정책에 대한 새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게 만든 상징적 장면이다. 수해방지를 위해 서울시가 지하와 반지하 주택을 모두 없애겠다고 발표한 것처럼, 각종 사회정책에서 사회적 약자 등 사람을 뒷전으로 보는 정책기조가 현실화할까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른바 ‘3고(고유가, 고물가, 고금리) 시대’에 코로나19의 재유행이 더해지는 고난의 시기에, 항상 진지한 자세로 중산층과 서민을 위하는 정치를 펼치려 부심했던 김대중 대통령의 삶을 되새겨본다.
-
어떻게 쭈그러진 심장을 펼 수 있을까요? [최진석][최진석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 우선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는 하나의 낭만적 명제가 아닙니다. 나를 아는 것이 모든 위대함을 실현하는 근본이기에 중요한 겁니다. 돈키호테는 산초가 섬을 다스리러 갈 때 세 가지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 둘째, 네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셋째, 관대해야 한다.” 모든 도덕적-윤리적 결단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여럿 중의 하나로 존재하는 한 우리는 지적 창의도 예술적 모험도 불가능하지요. 내가 누구인지부터 알라는 말은 현실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근본을 바로잡아 현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힘을 기르라는 의미지요. 심장은 왜 쭈그러질까요? 내 눈으로 나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믿지 않고,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 나를 비교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내가 기준이 되어야 삶의 만족도도 높아지고 현실에서의 성취도 커집니다. 외부의 것과 비교하거나 외부의 것을 추종하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주머니 속 체스 말에 불과합니다. 그건 곧 죽은 거예요.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볼 때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쭈그러진 심장도 쫙 펼 수 있겠지요. 돈키호테의 미친 정신을 망가뜨린 사람이 누군가요? 카라스코 학사입니다. 그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에요. 공부를 많이 했다는 건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되는 것을 더 많이 했다는 의미입니다. 바라는 것보다 해야 되는 것을 더 많이 했다는 의미입니다. 바라는 것보다 바람직한 것을 더 많이 알고, 좋아하는 것보다 좋은 것을 더 많이 아는 사람이지요. 저는 세르반테스가 의도를 가지고 학사를 배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정해진 윤리, 정해진 논리, 정해진 가치 규범으로 돈키호테를 다시 고향으로 끌고 들어왔어요. 돈키호테가 자기 자신일 때는 전부 미쳤다고 하더니 다수의 가치관을 따르자 다들 정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돈키호테는 어떻게 됐나요? 죽었어요. 나로 살다가 우리가 되는 순간 죽어버렸습니다. 나로 미쳐서는 생기발랄한 모험을 멈추지 않았는데, 끌려와 다시 우리 안에 집어 넣어진 순간 그는 죽었습니다. 돌아온 돈키호테를 보며 주위 사람들은 박수를 쳤습니다. 돈키호테가 자신에게 박수를 친 게 아니에요. 우리 모두 돈키호테처럼 죽지 않도록 “쭈그러진 심장을 쫙 폅시다.” 최진석,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열림원, 2022), 24~26쪽. “쭈그러진 심장부터 쫙 펴십시오. 그러면 나쁜 운수도 부숴버립니다.”
-
[기고] 아베수상의 성화에 대해 [한계희]본 기고문은 독자들의 판단에 따르며, 본지의 입장과는 관련없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주] [아베 수상의 성화에 대하여 - 공주가정교회 전 류세호 목사 사모 한계희(사진) 여사] 어제 아침 kbs뉴스에 야마가미씨 어머니가 10억의 헌금을 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이 뉴스를 본 사람들은 우리교회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지금까지 일본식구님들이 많은 헌금을 해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 헌금이 어떻게 씌여졌을까요? 금액보다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교회가 세계적인 선교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일본식구들님의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이뤄질 수 없을 만큼 많은 공헌을 한 게 사실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헌금이 필요했고 특히 일본은 신앙의 조국인 한국에 대해 과거 40년간 한국민을 핍박한데 대한 사죄의 마음으로 온 정성을 다해 헌금을 하고 직접 해외선교에 나가 우리교회가 세계적인 기반을 닦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것은 야마가미씨 한 가정의 일이 아니라 많은 일본식구들이 그렇게 헌신 봉사를 해온 것입니다. 그런 세계적인 기반 위에서 문총재님이 고르바초프를 만나 공산주의 깃발을 내려 멸망케 하시고, 지금은 한학자총재님이 요즘같이 자국 이기주의에 빠져있는 이때 지구 한가족을 이루시기 위해 세계적인 평화운동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일본 식구들의 이런 희생과 봉사가 세계평화운동의 초석을 다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일본 식구들이 전국 각처에서 그런 마음으로 열악한 환경에서도 참가정운동을 하며 가정을 지키고 사회 봉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인 기요미 준꼬 공주시 평화대사와 함께 위로를 전하는 한계희 여사.} 신앙의 조국인 한국을 위해 속죄의 마음으로 일본 국민 전체를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우리 일본식구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노정, 그것은 다만 한국인에 대한 속죄의 마음뿐이 아닌 일본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도, 그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조상들이 천상에서 평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자녀들의 아픔이 있었기에 오늘과 같은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한 내적인 사연을 모르는 분들은 헌금을 착취하는 사이비 종교로 낙인 찍을 수도 있겠으나 그 헌금을 납부한 순수한 마음을 알고 사용내역을 안다면 함부로 비난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일본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우리 한국인은 그런 일본 식구들에 대해 고마움은 가질지언정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역사에 대해 지금까지 일본정부 누가 반성을 하고 사죄를 했습니까? 우리교회 식구들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 한결같이 반성하며 희생 봉사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 일본 식구님들이 세계 도처에서 희생 봉사하며 세계적인 평화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제 우리나라도 과거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해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두 나라가 화합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될 때 안타깝게 성화하신 아베수상님도 그 희생이 헛되지않아 천상에서 평안한 삶을 누리시게 되리라 믿습니다. 야마가미씨 가정의 아픔은 그 가정 하나만의 아픔이 아닐 것입니다. 일본내의 수많은 우리 식구들이 그와 같은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아픔을 공유하면서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 위로하며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야마가미씨 어머니! 얼마나 힘드실까요? 한없는 위로와 사랑을 보냅니다.
-
[기고] 공주고 100년과 ‘교육도시 공주’의 미래김정섭 (민선7기 공주시장) “반만년 역사 위에 지나간 자취 / 전설도 무르익은 백제의 고도 / 흩어진 옛 문화를 쌓아올리려 / 모였네, 새 대한의 공주고 건아들. ”올해로 개교 100년을 맞은 공주고등학교의 교가이다. 100년 전 1922년은 어떤 때였던가? 1919년 3.1운동으로 일제 총독부의 ‘무단통치’가 이른바 ‘문화정치’로 기조를 바꾼 뒤, 1921년부터 충남도내 유지들이 뜻을 모아 충남에 고등보통학교(인문계 중등학교)를 설립해달라는 청원운동을 벌였다. 홍성·천안 등과 치열한 경쟁 끝에 공주가 1922년 4월, 조선사람을 위한 충청도지역 최초의 중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1602년(선조 35)에 충청감영이 설치된 이후 공주가 줄곧 충청지역의 행정·경제·문화중심지로서 역할을 해온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보다 먼저 설치된 대전중학교는 관립 일본인학교였는데, 공주고등보통학교의 설립자본은 민간의 기부금이었다. 말하자면 공주고보는 공립과 민립(도민모금)의 합동작품이었던 것이다.1922년 5월 11일 열린 첫 입학식 당시 신입생은 106명이나 되었지만, 아직 학교건물이 없어 공주공립보통학교(현 중동초) 교실을 빌려 ‘서둘러’ 개교했다. 공주고보의 설립·개교는 1928년 ‘공주공립고등여학교’(현 공주여고)의 설립이 뒤를 잇고 충남도청 대전 이전의 대가로 1933년 ‘공주공립농업학교’(현 공주생명과학고)와 ‘관립여자사범학교’(현 공주교대)를 설립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공주는 이미 존재하던 사립 ‘영명학교’(1906년 개교)와 함께 충청도는 물론 전국에서 유학 온 똑똑한 학생들로 북적이는 근대적 교육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공주고보에서는 학생들이 주도한 항일결사운동이 종종 발생했다. 1927년과 1929년, 일본인 교사들의 황국신민화 교육에 항거해 모든 학생들이 참여하는 동맹휴교가 벌어졌다. 1930년대에는 비밀독서회를 만들어 일제통치체제를 부정하는 서적을 읽거나 농민들을 선동해 적발되기도 했다. 공주고보 출신 중 독립유공자는 지금까지 10여 명에 이르는데, 기록이 불충분해 정부의 서훈을 기다리는 대상자들의 숫자가 이보다 더 많다. 공주고등학교 100년의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겉과 속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과 분단을 고단하게 넘어왔고 한국전쟁 때에는 학업은커녕 전장에서 나가 희생되어야만 했다. 총 3만여 명에 이르는 공주고 동문들은 산업화와 민주화시기에 공주를 비롯한 충청도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했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정치, 행정, 법조, 경제, 교육, 의료, 예술, 체육 등 각계에서 뚜렷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오는 7월 9일, 100년 성상의 공주고등학교 교정에서 역사적인 백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공주고 100년사> 발간, 100주년 기념관 개관, 100주년 기념공원 조성, 장학기금 마련, 동문 화가 전시회 개최 등 다채롭고 뜻깊은 기념사업들이 함께 펼쳐진다. 하나하나가 충남의 중등교육 100년을 기념하는 표석이다.공주고등학교 동문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자부심과 연대감이 강하다. 공립학교로서의 특성인지 국가와 지역사회를 향한 참여의식 또한 남다르다. 지역공동체 안에서 압도적인 역사와 전통을 가진 가장 큰 학교 출신으로서 포용력이 돋보인다. 이 특성들은 과거뿐 아니라 미래에도 지역발전에 큰 밑거름이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공주고등학교는 학령인구의 지속적 감소, 수도권과 대도시로의 집중현상, 디지털혁명의 급속한 진전 등 지방학교가 겪는 공통적 어려움에 맞닥뜨리고 있다. 학교와 동문, 학부모와 지역사회가 함께 넘어야 할 벽이다. 진취적 비전과 담대한 도전이 필요하다. 공론의 마당에서 만나야 한다. 공주고 100주년은 곧 교육도시 공주의 100주년이다. 또다른 100년을 잘 맞이하기 위해 다함께 마음을 모아야 할 때다. 공주고등학교 백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
공주고 100년과 ‘교육도시 공주’의 미래김정섭 (민선7기 공주시장) “반만년 역사 위에 지나간 자취 / 전설도 무르익은 백제의 고도 / 흩어진 옛 문화를 쌓아올리려 / 모였네, 새 대한의 공주고 건아들.” 올해로 개교 100년을 맞은 공주고등학교의 교가이다. 100년 전 1922년은 어떤 때였던가? 1919년 3.1운동으로 일제 총독부의 ‘무단통치’가 이른바 ‘문화정치’로 기조를 바꾼 뒤, 1921년부터 충남도내 유지들이 뜻을 모아 충남에 고등보통학교(인문계 중등학교)를 설립해달라는 청원운동을 벌였다. 홍성·천안 등과 치열한 경쟁 끝에 공주가 1922년 4월, 조선사람을 위한 충청도지역 최초의 중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1602년(선조 35)에 충청감영이 설치된 이후 공주가 줄곧 충청지역의 행정·경제·문화중심지로서 역할을 해온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보다 먼저 설치된 대전중학교는 관립 일본인학교였는데, 공주고등보통학교의 설립자본은 민간의 기부금이었다. 말하자면 공주고보는 공립과 민립(도민모금)의 합동작품이었던 것이다. 1922년 5월 11일 열린 첫 입학식 당시 신입생은 106명이나 되었지만, 아직 학교건물이 없어 공주공립보통학교(현 중동초) 교실을 빌려 ‘서둘러’ 개교했다. 공주고보의 설립·개교는 1928년 ‘공주공립고등여학교’(현 공주여고)의 설립이 뒤를 잇고 충남도청 대전 이전의 대가로 1933년 ‘공주공립농업학교’(현 공주생명과학고)와 ‘관립여자사범학교’(현 공주교대)를 설립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공주는 이미 존재하던 사립 ‘영명학교’(1906년 개교)와 함께 충청도는 물론 전국에서 유학 온 똑똑한 학생들로 북적이는 근대적 교육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공주고보에서는 학생들이 주도한 항일결사운동이 종종 발생했다. 1927년과 1929년, 일본인 교사들의 황국신민화 교육에 항거해 모든 학생들이 참여하는 동맹휴교가 벌어졌다. 1930년대에는 비밀독서회를 만들어 일제통치체제를 부정하는 서적을 읽거나 농민들을 선동해 적발되기도 했다. 공주고보 출신 중 독립유공자는 지금까지 10여 명에 이르는데, 기록이 불충분해 정부의 서훈을 기다리는 대상자들의 숫자가 이보다 더 많다. 공주고등학교 100년의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겉과 속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과 분단을 고단하게 넘어왔고 한국전쟁 때에는 학업은커녕 전장에서 나가 희생되어야만 했다. 총 3만여 명에 이르는 공주고 동문들은 산업화와 민주화시기에 공주를 비롯한 충청도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했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정치, 행정, 법조, 경제, 교육, 의료, 예술, 체육 등 각계에서 뚜렷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오는 7월 9일, 100년 성상의 공주고등학교 교정에서 역사적인 백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공주고 100년사> 발간, 100주년 기념관 개관, 100주년 기념공원 조성, 장학기금 마련, 동문 화가 전시회 개최 등 다채롭고 뜻깊은 기념사업들이 함께 펼쳐진다. 하나하나가 충남의 중등교육 100년을 기념하는 표석이다. 공주고등학교 동문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자부심과 연대감이 강하다. 공립학교로서의 특성인지 국가와 지역사회를 향한 참여의식 또한 남다르다. 지역공동체 안에서 압도적인 역사와 전통을 가진 가장 큰 학교 출신으로서 포용력이 돋보인다. 이 특성들은 과거뿐 아니라 미래에도 지역발전에 큰 밑거름이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공주고등학교는 학령인구의 지속적 감소, 수도권과 대도시로의 집중현상, 디지털혁명의 급속한 진전 등 지방학교가 겪는 공통적 어려움에 맞닥뜨리고 있다. 학교와 동문, 학부모와 지역사회가 함께 넘어야 할 벽이다. 진취적 비전과 담대한 도전이 필요하다. 공론의 마당에서 만나야 한다. 공주고 100주년은 곧 교육도시 공주의 100주년이다. 또다른 100년을 잘 맞이하기 위해 다함께 마음을 모아야 할 때다. 공주고등학교 백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
어설픈 교류논리로 ‘죽창가‘를 모독하지마라그때 관군의 좌선봉장 이규태는 다음과 같이 농민군의 처절한 전투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아! 수만이나 되는 비도가 사오십 리에 걸쳐 길을 쟁탈하고 산봉우리를 점거한 뒤, 동쪽에서 소리치고 서쪽에서 밀려들고 좌에서 번쩍 우에서 번쩍 하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올라오니, 도대체 저들은 무슨 의리, 무슨 담략을 지녔기에 저리할 수 있는 것일까?”-공산초비기(公山勦匪記) -‘해산해서 목숨은 부지 할지 몰라도 양반위에 왜놈들이 올라타서 다시 개돼지로 살아야 것제’ -‘겨우 몇 달이었지만 사람끼리 동등하게 대접받는 세상을 살다보니 찰나를 살아도 사람처럼 살다가 사람처럼 죽겠다 이 말여’ - ‘저 우금티가 경계가 아니었네 저들은 그걸 뛰어 넘어섰으니까’ -드라마‘녹두꽃’우금티 전투 장면 대사중에서 2019년 SBS에서 방영된 ‘녹두꽃’ 드라마를 보면서 동학 농민 혁명 전투의 관군 선봉장이었던 이규태가 이해하지 못한 의리와 담략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우금티에서 모두 죽은 것은 관군과 왜군의 우수한 화력도 아니었고, 전봉준 장군의 무리한 전략도 아니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종이면 태어나자마자 종이 되어 평생을 살아야했던 이 민족 수 천 년 종살이의 굴레에서 벗어나 평등세상과 대동세상을 이루기 위한 고귀한 민주화 투쟁이 그 의리와 담략이었다. 광주 5.18민주 항쟁 이 후에 그 정신을 기리는 ‘민중의 노래’가 살아나서 홍콩과 버어마에까지 민주화현장에 힘을 주고 있듯이 ‘죽창가’는 동학민주혁명의 아픈 역사를 김남주시인이 감옥에서 피눈물로 기록한 평등세상을 향한 혁명군 후예들의 애국가이다. 시골마을 시장후보를 옹호하기 위해 함부로 입에 담을 노래가 아니다. 그렇게 교류를 갈망하는 일본 왕실은 동학농민군의 영령 앞에 한번이라도 사과했는가? 36년 식민지배에 대하여 성노예로 끄려간 수십만 여인들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는가? 1997년부터 21년간의 이어온 일제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하여 결국 일본 법정에서는 패소하고 2018년 겨우 한국대법원에서 승소한 판결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배상을 거부하고 오히려 경제 보복을 하고 NO재팬의 여파로 기울어진 외교의 현실이 아닌가? 이런 와중에 우금티의 영령들의 이름 한자 찾아서 묘비라도 새겨주는 성역화 사업을 공약하지는 못할망정 1년에 한번 시민단체에서 제사 한번 모시는 3천만원 2022년 예산마저 전액 삭감 칼질하는 국민의 힘 공주시의회 의원들의 만행 위에 이제는 그 당의 시장후보마저 일본 왕실과 교류카드부터 꺼내드는 상황이니 가히 친일의 아류라 아니 할 수 있나? 거기에 더하여 모 언론에서는 ‘죽창가’를 꺼내들고 모욕하며 처갓집 독립운동을 거론하는 행태는 또 무엇인가? 가족의 독립운동을 거론하고 무슨 기념관을 논하기 전에 먼저 일본왕실과 극우세력에게 제대로 사과부터 하고 피해 본 한 맺힌 조선 민중들 돌아가시기 전에 배상부터 하라고 적는 것이 언론의 순서라 생각되는 바이다.
-
충남교육의 앞날을 위해 고뇌한다!조영종(前 한국교총 수석부회장) 충남교육에 있어서 5월 3일은 참 큰 의미가 있는 날이 되었다. 이날 오전 10시 반에는 충남교육청에서 현직 교육감이 3선에 도전하는 출마 선언이 있었고, 오후 2시에는 중도보수 단일화 후보라는 사람이 충남도청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이 두 건의 기자회견을 보도한 언론들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충남교육의 앞날을 위한 참으로 깊은 고뇌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교육감이라는 자리가 자기 진영사람 일자리 창출하는 곳도 아니고 자기 주머니 채울 뇌물 받는 자리도 아니지 않은가? 김지철 후보의 기자회견에는 자화자찬이 넘친다. 이것도 잘했고, 저것도 잘해서 이제는 더 할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웬 3선 도전인가 싶다. 그러면서 왜 그가 3선을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하여 많은 이유 중 한 가지로 책임이 떠올랐다. 바로, 책임 질 줄 모르는 8년이었다. 학생들의 기초기본학력이 낮아져도 인성교육이 바닥을 쳐도 그건 코로나 19 탓으로 돌리는 모양새다. 머나먼 타국 네팔까지 교육 봉사 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온 네 분 선생님 원혼들에게 누가 어떤 책임을 졌단 말인가? 4년 넘게 남의 땅 위에 집 짓고 불안하게 사는 천안한들초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누가 어떤 책임졌다는 말인가? 공모 교장에 응모했다가 좌절당한 많은 선생님께 당신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인사에서 진영논리가 지나쳤다고 그래서 실망하게 해 미안하다는 사과의 빈말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3선 도전을 선언하면서“힘을 모아 달라. 더 안전하고 쾌적하고 더 행복한 학생 중심의 충남교육을 만들겠다.”라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답답하다. 가슴을 찢고 울고 싶다. 교육의 양심은 시인(是認)이다. 책임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양심이 드러내지 않고 숨기려 하기에 충남교육 계속 뒤처져 가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자다운 양심을 가진 그런 교육감을 충남 도민은 원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이병학 후보는 기자회견에서 뇌물을 받고 옥살이를 한 것은 모두 “변명의 여지 없는 불찰이자 과오라서 지난 20년 동안 뼈를 깎는 심정으로 속죄의 시간을 보내왔다”라고 했다. 그러면서“교육감은 도덕성과 품성이 요구되는 자리인 만큼 출마를 수없이 망설였다”라고 했다. 그런데 왜 나왔을까? 당연히 출마하지 말았어야 했다. 단일화라는 가면 속에 가려진 지나간 시간 속의 과오가 과연 충남교육이 중도보수의 교육적 가치를 담보할 수 있을 것이며, 정치적 보수색을 입힌다고 한들 대한민국의 미래 교육의 청사진이 그의 의식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충남교육의 교육감 자리는 깨끗하고 검증된 정말 순수한 사람만이 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기자회견을 보고 개탄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충남교육에 대한 교육 정론을 펼쳐야 한다. 그게 충남의 청소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34년 6개월 동안 교사, 부장교사, 장학사, 교감, 장학관, 교장을 두루 거치고, 근무하는 학교마다 미달하던 학생들이 차고 넘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생겨나고, 담임 반 모든 학생의 집 가정방문은 물론 교감, 교장 시절에는 다문화 가정 학생, 특수교육 대상 학생, 학교 폭력 가·피해 학생 집을 다 찾아다녔던 그 열정으로 지켜왔던 교단이기에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깨끗하고 정직한 검증된 교육자다운 교육자로 일생을 살아왔기에 대학 강단에만 있었던 다른 두 후보보다는 충남교육청, 교육지원청 그리고 일선 학교에서 근무한 다양한 경험이 있기에 충남교육을 교육 정론에 따라 이끌어갈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 충남교육은 어른들 권력의 장이 아니라 미래를 살아갈 우리 청소년들의 성장 터전이다. 그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그 꿈이 실현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줘야 할 책임이 우리 어른들에게 있다. 따라서 충남의 청소년들을 위해 교육 정론을 펼칠 제대로 된 교육감이 지금 우리 충남에는 필요하다.
-
[기고] 새로워지는 일 [최진석][ 사) 최진석 새말 새몸짓 이사장.] 새해가 밝았다. 새로운 해는 차라리 ‘새로워진 해’라고 표현해야 더 맞겠다. 세계는 동사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해를 바라보고 감탄하고 다짐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그보다는 자기 앞에 있는 바로 그해를 새로워지게 하는 것이 더 진실하다. 새로워지는 일에 관해서는 오래된 중국의 고전 『대학』에 아주 잘 나와 있다. “날로 새로워지고, 날이면 날마다 새로워지며, 또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다산 정약용은 이 책 제목을 ‘대학(大學)’이 아니라 ‘태학(太學)’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고급 교육이 아니라 통치자에게 하는 교육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내용은 위정자나 지배층에 있는 사람들이 새겨야 할 말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이제는 통치 지배력의 주도권을 시민이 가지는 민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누구나 새겨야 할 말이다. 사회든 기업이든 리더라면 누구나 새로워지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새로워지는 일이 왜 그리 중요한가.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생존의 터전인 세계가 계속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변화에 적응하면 살아남아 번성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사라진다. 새로워지는 일이 왜 그리 중요한가.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생존의 터전인 세계가 계속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세계가 새로운 곳으로 계속 이행하는 운동을 우리는 변화라고 한다. 변화에 적응하면 살아남아 번성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사라진다. 인간이나 동물에게 모두 맞는 말이다. 심지어는 역사나 사상 혹은 이념이나 가치관에도 모두 해당되는 원칙이다. 사람이 성장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이유는 세포가 계속 교체되기 때문이다. 옛 세포가 새 세포로 바뀌어 새로워지지 않으면 병들거나 죽는다. 뱀도 허물을 벗어야 한다. 허물은 옛집이다. 어떤 이유로든 옛집에 남아 안주하고 있으면 죽는다. 뱀만 그러하랴. 세계가 변화하는 것에 따라 이념이나 가치관도 바뀌지 않으면, 그 이념의 주인도 따라서 도태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송나라에 밭을 갈아 먹고사는 농부가 있었다. 하루는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토끼가 뛰어나오더니 밭 가운데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었다. 졸지에 토끼를 얻은 농부는 다음 날부터 농사를 팽개치고 그루터기만 지켜보며 또 그런 토끼가 나오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한 마리도 얻지 못하고 결국에는 온 나라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꼬리를 달고 돌아다니는 이 이야기가 『한비자(韓非子)』의 「오두(五蠹)」편에 나온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오두’는 나라를 망가뜨리는 다섯 종류의 부류를 좀벌레에 기대어 한 비유다. 이 농부처럼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뜻이다. 송나라는 은나라 유민들이 세운 나라로, 유학의 기풍이 강했다. 고대 유가적 성왕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나라였다. 그래서 시선은 줄곧 과거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초나라와 전쟁을 하면서도 송나라의 양공은 과도한 명분과 고대 성왕들이 제시한 기준만 지키다가 대패하기도 한다. 여기서 한심한 도덕주의자나 명분주의자를 빗대어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말이 나왔다. 나라가 망하려면 논의가 미래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과거의 주제들로 채워지는 현상이 지속된다는 것을 한비자는 말하고 싶어 했다. 바보는 과거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한다. 세계는 계속 변화고 있는데도, 가만히 멈춰 서서 변해 가는 세상만 탓하고 있다면 누가 그 사람에게 창의적 번영을 가져다주겠는가. 이렇게 말하면 옛것을 제대로 익힌 다음 새것을 알아야 한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들이밀지도 모르겠다. 매우 얌전하고 성숙한 말이다. 그러나 실재 세계에서 보통 사람들은 ‘지신’까지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욕을 먹든 말든 이미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기득권을 만들어 준 과거가 더 찬란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온고’의 중력을 이길 내공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많이 않아서, 대개는 ‘온고’만 하다가 세월 다 보낸다. 그래서 이 말은 차라리 순서를 바꾸어 ‘지신온고’가 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몸을 새로운 곳을 향해 기울여 놓고 과거를 알려고 해야 한다. 과거는 목적이 아니라 가벼운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 낫다. 과거의 논의로 현재를 채우고, 과거의 방법으로 현재의 문제를 풀려고 하면 ‘수주대토’한 농부처럼 웃음거리가 된다. 그런데 바보들은 언제나 다른 결과를 기대하면서도 계속 같은 방법을 쓴다.
-
[기고] 육군사관학교 안동 이전 절대 반대한다 [허남영]( 2015년 5월2일 육군사관학교 안중근장군동상 제막식 행사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는 국국간호장교출신 허남영 계룡시의회 의원.) ‘집권 여당 대통령 후보가 육사를 안동으로 이전한다는 공약을 발표했다’고 정초부터 난리다. “육군사관학교가 서울에 있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며 “안동의 지역경제 활성화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민족 대명절인 설연휴에 그렇게 발표를 했어야 하나? 우리 대한민국이 왜 이지경이 되었을까? 적어도 나라 살림을 맡겠다는 분들이라면 정초에 세상을 내다보는 눈으로 국민들께 희망을 줄 수 있는 공약발표를 했어야 한다. UN본부는 아니더라도 어떤 기구 하나 유치를 검토해 보겠다든지 국제 PKO 교육원을 건립하여 전 세계의 평화유지 활동에 선도적 역할을 하겠다고 했어야 한다. 얼마 전 카블 공항을 질주하는 미군 수송기에 매달렸던 아프가니스탄 시민들의 영상이 지워지지 않는 필자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뉴스가 아니었다. 아쉬움을 넘어 우려스러운 마음으로 몇 마디 더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창군과 함께 하는 육군사관학교가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인 것을 알기는 하는지. 화랑연병장에서 사관생도들이 내딛는 발걸음 소리에 심장 떨림을 경험한 적은 있는지. 위국헌신, 군인 본분을 마음속에 담은 그들의 함성을 들어본 적은 있는지. 내 생명 조국을 위해라며 굳게 다문 그들의 입술을 본적은 있는지. 세계를 향하는 그들의 눈빛을 본적은 있는지. 그리고 누구를 위한 육사 이전인지 공약발표자들에게 묻는다. 육사 이전에 대한 논란은 이미 대권을 꿈꾸던 여당 소속 광역지자체장과 기초자치단체장이 주도하여 충청지역에서는 익숙해진 현안이다. 그래서 서로 간의 협의는 있었는지 묻고 싶다.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충청도민에게는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 지역 민주당 지도자들은 또 무엇을 했단 말인가? 대선후보야 그렇다 치자. 하지만 이 지역 민주당 지도부는 대통령 후보와 그 어떤 소통도 없었단 말인가? 그렇게 많은 예산을 동반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추진해 온 사업마저 이렇게 실망스러운데 그 이상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하여 이지역 민주당 지도부에서는 사안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지역민들에게 소상히 알리고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나무 한 그루를 옮기더라도 토양상태나 풍광을 살펴서 이루어지는데 대한민국 국군의 상징이자 뿌리가 되어온 육군사관학교가 어쩌다 선거때만 되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만약 계룡산 산신령이 살아 있다면 간절하게 빌어본다. “육군사관학교를 지켜주세요. 그래도 누군가가 또 으르렁거리며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한다면 3군 본부가 위치한 안전한 이곳, 국방수도 계룡시로 육사를 옮겨 주십시오”라고 온 정성을 다하여 기원해 본다. 한 군인이었으며 현 이 지역 의원으로서 임인년 새해 설 명절을 오그라들게 했던 공약발표를 보면서...
-
봅슬레이와 마늘 밭의 진리 [최진석]봅슬레이와 마늘 밭의 진리 [새말새몸짓이사장 최진석] 2016년 벽두에 캐나다에서 짜릿한 소식이 들려왔다. 국제봅슬레이켈리턴연맹(IBSF) 월드컵 5차 대회에서 원윤종, 서영우 선수가 남자 2인승 경기에서 우승을 한 것이다. 이번 금메달이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 딴 것이라고 하니 더욱 놀랍니다. 사실 봅슬레이가 우리에게는 그다지 대중적으로 알려지거나 크게 인기 있는 종목은 아니다. 열악한 차원이라는 평가도 과분할 정도로 국내의 제반 여건이 아직은 갖춰지지 않은 상태다. 경기장도 없다. 장비가 없어 외국 선수들이 타던 중고 장비를 구입해 연습을 했다. 심지어는 다른 나라 선수들의 썰매를 빌려 타며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2013년에야 네덜란드 ‘유로테크’ 썰매를 처음 구입해 대회에 출전해 왔다고 한다. 두 선수가 호흡을 맞춘 것도 불과 4년밖에 안 되었다. 서 선수는 말한다. “다른 나라는 이렇게 대회가 연달아 열리면 뒤에서 썰매를 미는 역할을 하는 선수를 바꿔 가면서 하는데, 우리나라는 대체 선수가 없어서 하리가 안 좋은데도 뛰었다.” 이 대목에서는 코끝이 찡해진다. 그런데 벌써 세계 랭킹 1위다. 전후좌우의 조건들을 눈대중으로 따져 보고, 이리저리 계산해 보는 것으로는 절대 가능해 보이지 않은 일이다. 반년 전에 저세상으로 떠나신 내 어머니는 배움은 없으셨어도 재치가 넘치셔서 경험으로만 빚어낸 몇 조각의 지혜를 불쑥 내어 주기도 하셨다. 어린 시절의 어느 날이 생각한다. 초등학교 4학년 정도였을 때다. 친구들하고 장난치고 놀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던 내게 어머니께서 집 앞에 있는 밭에서 마늘을 뽑자고 하셨다. 내게는 감당이 안 되는 넓은 밭이었다. 깜짝 놀라서 “은제 이 많은 마늘을 다 뽑는당가?”라고 하면서 싫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루 종일 해도 다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은 게을르제만 손발은 부지런헌 것이다.” 나는 원래 또 몸을 써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잘하지도 못했다. 어머니는 이런 나를 아랑곳하지도 않고 먼저 마늘을 뽑으면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눈은 게을르제만 손발은 부지런헌 것이다.” 꼼짝없이 어머니 옆에 붙어서 마늘을 뽑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만 보였던 그 많던 마늘을 반나절 만에 다 뽑아 버렸다. 눈대중으로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았던 일을 묵묵히 손발을 움직이다 보니까 어느새 해낸 것이다. 어머니 말씀이 옳았다. 눈은 정말 게으르고, 손발은 부지런했다. 눈대중이나 계산속에 빠져서는 도약 같은 것은 아예 꿈조차 꾸지 못한다. 주변 조건의 제약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보들은 대개 조건의 제약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보들은 대개 자신의 어려움을 주변 조건과 남 탓으로 돌리는 데 익숙하다. 이런 태도로는 미래를 기약하지 못한다. 더 나아질 수가 없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현재를 밀고 나아가 아직은 분명한 모습으로 정해지지 않은 어떤 곳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그런데 다가올 미래는 미래의 문법으로 따져야 하겠지만 미래의 문법은 아직 충분히 숙성되지 않아서 미래를 보는 일마저도 현재의 문법으로 계산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다. 숙성된 미래의 문법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을 때, 충동적인 누군가는 비문법적 행동을 새로운 곳을 향하여 건너뛰려 덤빈다. 이것을 보통은 무모함이라 말하고 모험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무모함이나 모험은 분명히 미래를 향한 행위들이다. 이런 무모한 실천과 행동이 없이 그저 눈대중이나 계산속으로 나온 판단에만 의존해서 이 궁리 저 궁리에 빠져 있거나 갑론을박하는 논쟁에만 빠져 있으면 현재는 급격히 부식된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나 현재를 돌파하는 일은 눈대중이나 계산을 벗어나는 일이다. 바로 꿈이다. 어떤 계산으로도 봅슬레이 우승은 점쳐질 수 없다. 내가 반나절 만에 그 많은 마늘을 다 뽑는다는 것은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나 현재를 돌파하는 일은 눈대중이나 계산을 벗어나는 일이다. 바로 꿈이다. 문제는 꿈을 꾸느냐, 안 꾸느냐다. 꿈을 꾸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꿈을 향해 무모함을 감당하느냐, 감당하지 않느냐의 문제다. 결국은 손발을 움직이는 일이다. 행동이다. 무모함을 통과하지 않고 빚어진 새로운 역사는 없다. 모험, 즉 위험을 뒤집어쓰지 않고 강을 건널 수는 없다. 미래가 벌써 암울하게 느껴지는가. 혹시 겁을 먹고 있지는 않은가. 봅슬레이의 꿈과 마늘 밭의 손발이 진리다. 썰매도 경기장도 없던 한국의 봅슬레이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우뚝 섰다.
-
[기고] 온양행궁의 원형복원과 미래의 성장 동력 [유규상][행정학 박사 유규상] 온양행궁의 복원을 놓고 재현이냐, 원형복원이냐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재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온양행궁의 복원과 관련된 주변 상권의 현실적 이익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원형복원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문화재 보존에 있어 역사성과 현장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두 가지 주장에는 나름의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아산(온양)의 미래와 정체성을 감안한다면 원형복원이 맞다. 그러나 원형복원이든 재현단지 조성이냐의 정책결정의 방향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한편, 어느 지역에서나 문화재의 보존과 지역개발의 문제는 첨예한 갈등 양상을 보인다. 이것은 지역의 정체성 확보문제와 주민들의 현실적 이익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여와 공주는 백제시대의 수도였던 덕택에 역사고도로서의 문화적 유산을 소재로 현대에도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해 성장 동력을 창출하고 있다. 어쩌면 지역적 정체성에 문화유산을 우선순위로 당연시하는 지역정서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산(온양)은 어떤 곳인가. 온양온천이 문헌적으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백제 온조왕 36년(AD 18)에 탕정성(湯井城)을 쌓았다는 삼국사기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 후 고려시대에는 온수(溫水)로, 조선시대에는 온양(溫陽)으로 명명되고 있듯이 온천지로서 운명적 특성을 타고 났다. 그래서 흔히 온양(아산)하면 인물로는 이순신 장군이 대표되고 자연자원은 온천이라는 물의 문화가 대표적 정체성으로 알려져 왔다. 현재는 전국의 새로운 온천지가 개발되면서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작아졌고 문화자원으로서도 존재감도 감소하였다. 온양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문화적인 자원이 부족한 측면을 고려한다면 온천문화 지역으로의 명성과 전통은 계속 이어 나가야 할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온양행궁의 복원은 21세기 문화의 세기에 아산(온양)이 어떻게 무엇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지와 관련되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단지 온양행궁의 복원이 문화재의 재현에 국한된 문제라기보다는 온양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그런 역사성의 토대 위에서 미래의 먹거리를 창출해야 하는 절박성이 깔려 있다. 물론 수도권에 가까워 많은 기업체들이 이 지역에 둥지를 틀고 있어서 재정적으로 어려운 지역은 아니지만 미래의 먹거리는 그것만으로는 장담할 수 없거니와 새로운 문화적 소재를 자원화 해야만 지속적으로 성장 동력을 창출할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21세기 문화의 세기에 부응하기 위하여 없던 문화자원도 새롭게 발굴해가는 현실에서 온양행궁의 복원은 그동안 이어온 온천문화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측면에서 아산에게 주어진 일종의 문화적 축복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잘 복원하면 아산의 랜드마크이며 관광자원으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런 중대사안의 결정은 감정을 앞세운 현실적 논리보다는 차분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문화재의 복원과정에서 이해집단들의 현실적 이익을 고려해야하지만 근시안적으로 접근하면 본연의 문화유산을 영구히 훼손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동안 온양행궁의 복원에 대하여 몇 번의 학술세미나가 있었고 최근에도 학술 토론회가 있었지만 그 추진방식에 대하여 한 치의 진전도 없이 원점에서만 맴돌고 있다. 복원방식에 대하여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동안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은 당초에 설계했던 비용보다 2배가량은 더 뛰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소요비용은 더 늘어 날 것으로 예견됨에 따라 원형복원에 가장 큰 걸림돌은 복원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의 확보문제로 귀결된다. 이와 함께 온양행궁터는 조선왕조의 흥망성쇠와 더불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소유권이 일본사람들에게 넘어갔고 현재는 관광호텔이 들어섰으며 주변에는 상권이 형성되었다. 행궁복원을 추진할 경우 도시재생의 요구와 맞물려 호텔 이전과 주변상권의 보상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에 소요되는 비용과 주변상권과 관련된 주민들을 설득해야 하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행정당국은 그러한 책임과 부담감으로 인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부담감은 대부분의 시민들로 하여금 원형복원보다는 재현단지를 고려하야 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하기 쉽다. 재현단지는 행궁의 옛 모습을 고증해서 그 모습으로 다른 장소에 그대로 만들어 복원하면 된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원형복원보다 현장성과 원형성에서 크게 떨어지고 문화유산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 국가가 백제시대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을 비롯한 문화재에 대하여 원형복원을 위해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 공을 들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형복원을 하자면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험난한 길이지만 아산은 그 길을 가야만 하는 숙명이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문화유산의 유지와 관리는 지역민들의 수많은 인내와 고통을 먹고 산다. 공주와 부여, 경주 등 문화재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그 불편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온양(아산)의 정체성을 살리는 문제는 그 불편함 보다 더 중요하다. 온양행궁 복원에 관하여 후손들에게 원망을 듣지 않으려면 지금 현재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올바른 정책결정을 해야 한다. 행궁의 원형복원은 주변상권의 보호와 도시재생에 걸림돌이 아니다. 오히려 단기적으로는 불이익처럼 생각할 수 있어도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면 온양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미래의 먹거리 창출의 성장 동력이다. 비용문제 해결과 추진의지를 심어주는 것은 전문가들과 시민 모두의 몫이다. 행정당국이 용기와 의지를 가지고 원형복원에 나설 수 있도록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요청된다. 우리 속담에‘우는 아이 젖 준다’는 말이 있다. 다가오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약으로 채택될 수 있도록 정치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지금은 재현 보다는 온양행궁의 원형복원에 초점을 맞추고 그 안에 담을 콘텐츠 개발과 온양(아산)의 미래발전과 연계한 큰 그림을 그리는데 고민을 할 때이다.
-
[기고] 윤석열 국민의힘 선대위... "정권교체, 후보 중심, 전면 개편 - 쇄신해야" [김덕근][바른태권도시민연합회 대표 - 국제스포츠인권위원회 위원장 김덕근] 성 명 서 [김 덕 근] 다수의 국민은 윤석열 후보 중심의 소신있는 전면 刷新을 원한다. 김종인 총괄 선대위원장과 이준석에게 정권 교체를 갈망(渴望)하는 국민의 이름으로 묻는다. 김종인 위원장과 이준석이 공모한 선대위 장악 목적의 무혈 쿠데타 인가? 국민의힘은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더이상 주권자인 국민을 실망시켜서는 안 되며 또 민심에 역행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정권 교체를 갈망하는 국민들은 정체성을 의심받고 있는 김종인 총괄 선대위원장과 정치공학적 운명공동체인 이준석 등을 즉각 숙청(肅청)을 원한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이준석은 성상납 논란에 휩싸여 국민적 지탄(指彈)과 더불어 믿음과 신뢰를 의심받고 있다. 윤석열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는 후보 중심으로 소신있는 전면 쇄신을 해야만 정권교체를 원하는 국민들에게 믿음과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윤 후보 선대위의 전면 쇄신은 후보가 중심이 되어야지 윤 후보를 보좌하는 김종인 중심으로 쇄신하는 것은 주인은 손님처럼 손님은 주인처럼 각각 행동하는 것과 같은 주객전도(主客顚倒) 라 아니할 수 없다. 또 정치공학적 한 몸통인 김종인과 이준석의 만행(蠻行)이 정치공학적 으로도 자기 정치만 일삼는 이기적 탐욕적 망동(妄動)이 아닌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김종인 총괄 선대위원장은 지난 3일 선대위 전면 쇄신과 관련해 후보와 전혀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선대위 조직을 전면 쇄신하겠다 고 발표했다. 더불어 김 총괄위원장은 윤 후보를 향해 비서실장 노릇을 할 테니 후보도 태도를 바꿔 우리가 해준 대로만 연기를 좀 해달라 라고 망언(妄言)해 국민과 정치권에서 논란이 뜨겁게 확산되고 있다. 이에 김종인 위원장의 정제되지 않는 후안무치한 망발은 윤 후보에 대한 인격 모독(人格冒瀆), 인권 침해(人權侵害)를 넘어 인격 살인(人格殺人)에 가까운 조롱이다. 정권 교체를 갈망하는 국민들과 국민의힘 경선 과정에서 윤 후보를 지지했던 국민들에 대한 배신적 행위다. 국민의힘 후보의 지지율 하락의 근본적 원인은 윤 후보 선대위를 책임맡은 김종인 위원장과 자당 의 대선 후보 당선을 위해 당력을 총 집중해서 대선 관리에 만전을 기울여야 할 당대표인 이준석 때문이다. 김종인 위원장은 선대위를 전면 쇄신하겠다 는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믿음과 신뢰할 수 있도록 김종인 총괄 선대위원장 본인도 사퇴하는 것이 상식이며 국민에 대한 도리이다. 따라서 국민의힘 국회의원들과 윤석열 후보는 국민의 봉사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로지 정권교체를 갈망하는 국민만 바라보고 김종인 총괄 선대위원장을 비롯한 선대위 지도부를 전면 교체함과 더불어 해당행위자 이준석을 숙청하고 당헌당규에 따른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해서 선대위 업무까지 겸하면 될 것이다. 이것이 깨어있는 국민들의 민심이요 준엄한 명령임을 분명히 직시해야 할 것이다.
-
정치 도약 없이 국가 도약 없다 [최진석]문명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은 생각으로 문명을 건설한다. 함석헌 선생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하시면서 생각이 핵심임을 갈파해주셨다. 함석헌 선생은 또 말씀하셨다.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니. 뜻 깨달으면 얼, 못 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뜻도 모르면 개요 돼지다.” 생각하는 능력이 없으면 뜻도 없다. 생각하지 않아서 뜻이 흐트러지면, 어떤 일이라도 다 흐트러진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그 사람의 생각과 뜻이 어떠한가가 결정한다. 그 부자가 어떤 부자인가는 그가 소유한 부의 규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를 다루는 생각과 뜻의 크기가 결정한다. 그 권력자가 어떤 권력자인가는 그에게 허용된 권력의 강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을 다루는 생각과 뜻이 결정한다. 그 지식인이 어떤 지식인가도 그가 가진 지식의 질과 양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지식을 어떤 생각과 어떤 뜻으로 다루는가가 결정한다. 결국 세상사 모든 일은 최종적으로 생각과 뜻이 결정한다. 정치는 생각과 뜻의 수준이 그대로 반영되는 문제 해결 장치이자 군집 생활을 하는 인간이 행하는 하나의 종합예술이다. 정치가 꽃인 것이다. 정치 구성원들에게 생각하는 능력과 뜻이 잘 단련되지 않아 꽃을 잘 피우지 못한다고 해서 정치가 꽃이 아닌 것은 아니다. 인간은 정치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진화했다. 피워낸 꽃의 모습이 정원사의 실력이듯이, 한 나라의 정치에는 그 나라 국민들의 실력이 고스란히 담긴다. 이런 이유로 국가의 맨얼굴은 사실 정치다. 우리는 이제 BTS도 가졌고, 반도체도 가졌고, 오징어 게임도 가졌다. 이들이 우리의 얼굴을 빛나게 해주고 있다. 경제규모도 신생 독립국으로 출발한 나라가 이룬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크다. 그러나 BTS, 반도체, 오징어 게임, 경제규모는 우리의 맨얼굴이 아니다. 그것들이 정치를 흔들 수는 없지만, 정치는 그들을 흔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맨 얼굴은 정치다. 도쿄에 지하철이 생긴 해가 1927년이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1913년에 생긴다. 당시에는 지하철이 산업의 종합판이었음을 감안해 보면, 아르헨티나의 경제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1900년대 초에는 아르헨티나가 프랑스나 이탈리아보다 잘 살았다. 세계 10위~8위 하던 나라가 이제는 후진국에 속하게 되었다. 정치가 경제를 망친 결과다. 아마 포퓰리즘이라는 말도 아르헨티나에서 나왔을 것이다. 정치가 한 나라의 맨얼굴임을 알 수 있다. 기업이 실수를 해서 야기한 손해도 작지 않지만, 국가가 정치를 잘못하여 제도적으로 끼치는 손해는 기업이 야기한 손해정도는 애교로 봐줄 정도로 크다. 그래서 정치가 혼란스러우면 아무리 큰 경제 규모도 쉽게 무너지는 것이다. 모든 나라의 패망은 정치의 혼란 때문이다. 정치로만 스스로 무너진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국가나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망하는 경우는 없다. 거의 대부분은 망해가는 걸 목도하면서 망한다. 존재하는 어떤 것도 외부의 것에 의해서 망하는 것은 없다. 스스로 망하는 길을 가다가 외부가 자신을 망하게 하도록 허용하는 것일 뿐이다. 스스로 망해가는 전 과정은 정치적 형태를 띤다. 국가가 기능적 레벨에서 성장하여 한계에 도달하면, 바로 기술적 레벨로 상승시키거나, 기술적 레벨에서 성장하여 한계에 이르면, 바로 과학적 레벨로 상승시키는 일이 다 정치가 하는 일이다. 이런 상승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나라는 멈춘다. 멈추면 기운다. 이치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우리는 기아국가로 출발하여 원조하는 국가로 변신한 정도로 경제발전을 크게 이룬 나라다. 경제발전과 함께 정치발전도 이뤘다. 경제와 정치는 상호 부조하는 관계다. 그래서 정경(政經)이라고 정치와 경제를 서로 붙여서 부르기도 한다. 과거의 경제 급성장도 정치 급성장 없이는 불가능하다. 과거의 정치 형태가 자신의 정치관과 안 맞는 것일 수는 있다. 그러나 경제 급성장을 이뤘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정치가 급성장하는 요소도 분명히 있다. 여기까지 읽고 과거에도 정치 급성장의 긍정적 요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대목이 나오자마자 화가 나서 읽기를 멈추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런 사람은 지적인 두께가 얇거나 좁거나 외눈박이일 가능성이 크다. 김대중 대통령 때까지만 해도 국민들은 선거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 물론 역사 속에서 ‘체육관 선거’로 불리는 무도한 선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최선의 선택’에 의존하였다. 박정희-김대중, 노태우-김영삼-김대중, 김영삼-김대중-정주영, 이회창-김대중-이인제 등의 대결 구도에서 유권자들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신뢰하는 후보를 선택했던 것이다. 정치는 이래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어느 순간부터 정치에 뭔가 깨달음이 있는 척 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선거는 최선을 뽑는 것이 아니라 차선을 뽑는 것이라는 말들이 돌기 시작했다. ‘최선의 선택’이 ‘차선의 선택’으로 추락하였다. 지금은 ‘차선의 선택’에도 머무르지 못하고, 이제 ‘차악의 선택’으로 내몰렸다. 누가 덜 나쁜가를 선택해야 하는 단계까지 추락한 것이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맨얼굴이다. 정치가 추락하고 추락하다가 ‘차악의 선택’을 해야 하는 막장에 이르렀다. 국민은 정치가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막장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각 진영은 자기가 선택한 차악이 나라를 구할 것이라는 스스로의 착각에 빠져 위조된 정의감으로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다. 우중(愚衆)으로 전락한 반 이상의 유권자와 기본도 안 되어있는 후보자들이 벌이는 이런 막장 정치 드라마가 지금 우리의 맨얼굴인 것이다. 국민은 차악이라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렸으니, 외통수에 걸린 꼴이다. 지금 우리는 K자 상태에 있다. 우하향(右下向)으로 추락할 것이지 우상향(右上向)으로 도약할 것인지의 경계에 있다는 말이다. 우상향으로 가려면 과거보다 더 나은 정치가 되어야 하는데, 생각과 뜻의 수준이 떨어져 ‘차악의 선택’으로 내몰린 것으로 보았을 때, 우하향으로 갈 가능성이 커졌다. 지금 양대 주력 후보들만을 놓고 보았을 때는 분명히 과거보다 더 나아질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과거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는 당위와 희망을 객관적 사실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두 후보가 과거의 대통령들보다 더 낫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이치로 보면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의 경쟁 모습으로 보았을 때, 이재명과 윤석열은 문재인과 박근혜를 넘기 어렵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은 다음의 몇 가지 문제를 인정해야 한다. “국가관이 잘못되어 있어도 나라를 도약시킬 수 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도 국가 경영을 잘 할 수 있다. 과거의 사람들을 다 모아서 쓰고도 나라를 미래로 끌고 갈 수 있다. 논문 표절을 하고도 공정과 정의를 지킬 수 있다. 범죄 경력이 있어도 정직한 통치를 할 수 있다. 친한 사람들이나 편한 사람들하고만 일을 하는 사람도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효율적인 통치를 할 수 있다. 친인척에게 쌍욕을 하는 인격을 가졌어도 국가 경영에서 충동적인 결정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역사에 대한 인식이 좁아도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다. 평생 좁은 시야에서 일을 한 사람도 국가 통치를 할 때는 넓은 시야를 행사할 수 있다. 범죄 경력이 있어도 국가를 정의롭게 운영할 수 있다. 과학에 대한 인식이 얕아도 국가를 기술을 넘어선 과학의 높이로 끌고 갈 수 있다.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아젠다가 없이도 나라를 도약시킬 수 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가차 없이 내치는 습관을 가지고도 사회 통합을 이룰 수 있다. 시야가 좁아도 외교를 잘 할 수 있다.” 나라가 우상향으로 도약하기를 꿈꾼다면, 최소한 위에서 인정한 것들과는 다른 각도를 적용하여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데, 생각하는 능력이 배양되어 있지 않다면, 그마저도 힘들 것이다. 나는 이쯤에서 지금의 정치 풍경이 대한민국이 쇠락하는 조짐이 아니기 만을 빌 뿐이다. 이 글을 읽고, 누군가는 대안이 없다고 비판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각자 나름대로 뜻을 세우고 생각하여 '우상향'으로 나라를 이끌 수 있는 조건을 따져보고, 그 조건에 맞는 후보를 찾던지, 진영을 벗어나 상대적으로 그 조건에 더 맞는 후보에 눈길을 주고 새로 선택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이 이제는 한 단계 건너가야 한다는 것이다.
-
[기고] 검은 호랑이의 해, 정권교체...갈망하는 이유 [김주찬](국민의힘 충남도당 부위원장 김주찬 전 논산시 부시장) 임인년 검은 호랑이의 해가 밝았다. 연일 뉴스엔 대선 이야기가 메인을 장식한다. 올해는 국민행복을 가늠하는 대선이 있고 지방 선거등이 일정에 따라 계획돼 있다. 국민들은 코로나 종식과 정의가 통하고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의 지도자가 나오길 희망 아니 갈망하고 있다. 주권자인 대 다수 국민이 갈망하는 것은 국민행복을 위한 절체절명의 심정으로 정권교체란 시대적 화두와 민주적방식의 정의와 자유로운 소통이 보장되는 나라의 당위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문재인 정권의 5년 국정수행 기간 국민 여론을 거의 외면한 몰염치국정운영 방식은 문 정권에 대해 정권교체를 갈망하는 57% 국민들이 생겨 났다. 그들은 대동단결해 엄중히 현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이들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5년의 운명과 국민의 행복추구권의 확보는 정권교체만이 가능하며 또 이를 간절하게 염원하는 현명한 국민들의 구국적 결단에 달렸다”고 말한다. 우리는 국민 주권의 원리에 따라 문재인 대통령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민이 뽑은 이 나라의 통치자 이자 국민 전체의 봉사자, 대리인으로서 그 정치 내용 또한 국민의 뜻에 따라야 할 막중한 책무가 따른다”하겠다. 이에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력은 바로 주권자인 국민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 함에도, 문재인 정권은 국민 여망을 무참히 짓밟고 국민의 신뢰를 저버린 행위는 계속되있다. 이제 국민은 이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것이다. 작금의 현실을 일부 지식층들은 “과거 고려 시대 무신 정권의 독재 정권과 다름없다”고들 말한다. 법치주의의 국민주권의 원리는 근대 이후 민주정치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의 핵심적인 기본 원리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은 국민 주권의 원리를 망각한 채 법치주의 유린과 함께 공정과 정의를 말살시키는 루를 범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촛불정권 실현이란 미명하에 자행한 것은 오로지 거짓, 위선, 내로남불에 국민 분열의 갈라치기 등으로 이 나라를 초토화 시킨 반역자의 불명예가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라고 까지 말한다. 특히 촛불혁명을 악용하며 정치적 이익을 챙기는 문 대통령은 퇴임 후 사저 부지 매입을 둘러싼 11년 영농경력 이라는 거짓 문서를 제출해 농지를 사들였고 매입 후 9개월 만에 사저를 짓기 위한 형질 변경 허가를 받은 것 역시 특혜라는 것이다.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문 대통령 부부 단 둘이 살 사저가 796평 초호화 저택으로 알려졌다. 또한 검찰은 대장동 개발 특혜. 로비 의혹 관련 윗선의 실체적 규명을 위한 성역없이 무관용 원칙으로 수사해야 할 적법 절차를 무시하고 있다. 검사윤리강령은 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며 공익의 대표자로서 국법질서를 확립하고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며 정의를 실현함을 그 사명으로 한다고 돼있다. 이를 위반하고 있는 것이란 주장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회복은 정권교체로 만 가능한 것이 시대적인 명제가 되었다. 이제 시대적 대의를 위해 어떠한 개개의 감정은 잠시 접어 둬야 한다. 국가 운명을 건 운명공동체란 구국적 일념으로 똘똘 뭉쳐야 위기에 처한 이 나라가 바로 설 수 있고 국민이 행복해 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의 행복도 보장될 것이다. 이것이 국민들이 염원하고 필자가 주장하는 정권교체의 당위성이다. 이제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희망의 새 시대 시계는 행복이란 이름으로 곧 찾아 온 다는 자명한 사실을 국민 모두가 분명히 직시하길 두 손 모은다. 이것이 임인년 새해 검은 호랑이의 해 대선과 지방선거를 통해 사회정의가 바로 서고 국민행복이 보장되도록 정권교체를 해야하고 갈망하는 이유다.
-
[기고] 어느 정년퇴임 '공무원 의 절규'... 그대로 보시라 [무명씨]어느 정년퇴임 '공무원 의 절규'... 그대로 싣는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편집자, 주] ▲지금부터 보내는 글들은 21년 9월 13일날 공주시장님께 보낸 글입니다. 읽어보시면 글을 잘 쓰시니 느끼시는점이 있을것 같아 보내드립니다. 제가 공주시에서도 시민들께 근무했던 곳마다 다 똑같이 대해드렸습니다. 물론 직원도 포함입니다. 제 생각에는 타지에서 왔더라도 더군다나 정년퇴직까지 하는 사람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도청으로 전출 해줄것을 건의도 했는데요 어차피 그런 취급을 할 생각이었으면 보내는 것도 괜찮았을텐데요 공로패 1개 주시던데요. ▲단합이라는 것은 좋은것이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 하는 것은 단합이 아니에요. 시장님도 ㅇㅇㅇ 시장때하던 내용과 같은 방식으로 돌아간것 같아 좀 그렇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통하는 것임을 잘 알고 계시지요 어는분의 말씀이 본인이 대단한 분이라는 듯한 말을 들었습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속담도 있는데 공주분들의 말씀은 싸움은 붙이고 흥정은 말 린다고 하더군요 잘못된 일을 하는 분들은 시간이 지나면 결과를 알수 있을겁니다. 많이 안다고 해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 실천을 하는 사람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인들이 퇴직해서 서운하지 않느냐구요 41년 공직생활중 소신껏 했기에 후회도 미련도 없이 내가 할일은 다했다고 말했지요 공주분들은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던 주위환경이 참으로 안되었다는 생각을 가끔 해봅니다. 임금님 살던 이조시대나 조선시대와 똑같이 사는것 같습니다. 공주분들도 그렇다고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못고친다구요 안타깝습니다. 본인들 고향에서 잘... ▲공주에서 최근 몇년내에 느낀점은 1. 일본사람들과 비슷 하다. 2. 사극의 관리들과 공주시 공무원들이 비슷 하다. 라고 느꼈지요 저 나름 왜 그런지 생각의 정리가 되었지요 그러다보니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던 공주시 시민들이 불쌍하다고 느껴졌습니다. 본인들도 잘알고 있잖아요 그렇게 살지않으면 그곳에서 살기가 힘들지요 저처럼 말이지요 그래도 난 내가 잘못했던것이 아니기 때문에(민원인들께 물품을 안준적도 없고 서류를 없애버린적도 없고) 보건소는 전국적으로 물품을 이월해서 썼지 해가 바뀔때마다 반납했다 다시 받는 것은 아닙니다. 훈계와 견책의 내용이 그렇습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상황을 말이 되는것 처럼 만들고 또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상황이 놀라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했어도 시장님이 결단을 내렸으면 바로 잡을수도 있었을텐데 그것을 못 하시더군요 그러니 다른 분들도 못 하지요 옛날의 현명한 임금님들은 그런 상황에 대처를 잘 했습니다. 사극을 보다보면 알 수 있지요 ... ▲공주에서 느꼈던 것중 또 하나의 생각은 다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양반과 상민의 격을 생각하게되었고 옛날로 말하면 상민들이 양반에게 갑질하는 것과 같은 상황을 보았습니다. 저에게 직원들이 하는 행동들 때문에 느낀겁니다. 공주에서 알게된 내용이었지만 친정집안이 삼한 갑족이었고 황족 이었더군요 그런사람에게 을족 이하의 사람들이 갑질을 하고 있구나 생각했지요 전에도 글을 적었지만 대통령이 언론을 막고있어 아무것도 못 한다고 말한분이 있다고 했지요 공주도 똑같다는 생각을 안해보셨냐고 했더니 말씀을 안하시더군요 공주의 언론도 똑같습니다. 시장님이 가만히 있으시겠습니까. 어림없는 소리지요 어느 주민이 제가 물품을 안주었다고 했습니까? 참고로 영양제는 2갑이면 8명분인데 7명 명단밖에 없었구요 기저귀는 다른 서류에다는 주었다고 적었는데 약품수불부에는 안적은 분들을 안주었다고 명단을 올렸습니다. 말이 되나요? 그일로 받은 견책때문에 41년 공직생활을 한 사람에게 당연히 주었어야 하는 대통령 훈...
-
[기고] 허울 좋은 무늬뿐인 혁신도시 [박기영](박기영 공주시의회 부의장) ‘문재인정부가 대선공약으로 내건 수도권 공공기관 추가이전을 스스로 폐기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 이는 필자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난 11월 24일자 모 지방지 1면의 머리기사 하단 맨 첫줄에 나와 있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이어지는 기사는 ‘선거철 표심을 얻을 수 있는 요긴한 수단으로 공공이전카드를 내밀었다가 임기 말에 접어들자 내동댕이친 것이다. 이전하는 공공기관을 유치할 수 있는 혁신도시 지위를 각고의 노력 끝에 쟁취한 370만 대전·충남 시·도민들은 불과 1년 만에 정부로부터 공공기관 공수표를 받아들었다’고 적고 있다. 이런 기사를 1면에 올린 이유는 이러하다. 지난 11월 22일 세종공관에서 열린 출입기자와의 간담회에서 공공기관 2차 이전관련 질의에 김부겸 국무총리는‘(문재인대통령의 임기) 6개월 동안 사실상 어렵다.’고 답변한 것을 근거로 작성되었다. 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청천벽력과 같은 말인가?이는 임기 내 공약이행이 불가하다는 선언이다. 김총리는 또 ‘정부가 이전문제를 건드리기에는 너무 갈등이 크더라. 이전 대상이나 규모, 이전원칙 등 초안을 잡아놓으라고 균형위에 요청해 놓았다. 지금 공지했다가는 난리날거니까 준비했다가 다음 정부 오면 딱 넘겨주자’고도 했다고도 한다. 정책적 무능함과 부작위를 자인한 셈이다. 지난해 10월, 대전과 충남 혁신도시 지정 안이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심의를 통과하면서 대전시와 충청남도의 지역사회와 정치권에서는 혁신도시 지정을 축하하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열렬한 환영과 기대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코로나19로 시민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그토록 염원하던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게 돼 매우 기쁘다' 오늘의 성과는 오롯이 대전·충남 시·도민의 힘으로 이뤄낸 쾌거"라고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공주시에서도 큰 기대감에 ‘공공기관유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유치활동을 위한 예산을 확보하는 등의 발 빠른 행보를 보이며 일말의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총리의 답변 한마디는 공주시의 미래에 큰 충격의 강펀치를 날린 셈이다.필자는 공주시의회 제230회 정례회기간 중 기획담당관실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부서장에게 이 같은 사실을 전달했고, 다양한 각도에서 중단 없는 추진도 주문하였다. 담당공무원도 기관이전은 물론 신규 설립기관에 대한 유치활동도 병행하여 추진하겠다고 답변했다.세종시가 출범하면서 입버릇처럼 말해온 공주시와의 상생발전은 수 년간 지켜보았던 것처럼 녹록치 않아 보인다. 우리시는 동현동 스마트시티를 조성 입주기관의 부지 확보와 택지조성계획까지 서둘러 준비하고 있기에 혁신도시에 거는 기대가 크다. 그렇기에 2021년을 마무리해야 하는 12월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공허함은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다. ‘2022년 임인년 새해에는 공공기관유치위원회는 물론 공주시민이 나서서 기관유치를 위해 총력을 모으자’고 제안한다.
-
[기고] 국민의힘은 정권교체 국민 여망을 저버리지 마라! [김덕근][바른태권도시민연합회 대표 국제스포츠인권위원회 위원장 김덕근]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인선과 선거 캠페인 전략 관련 문제로 이준석 대표 및 김종인 총괄 선대위원장 의 미증유(未曾有)의 과도한 몽니는 월권적 망발(妄發)이 아닐 수 없다. 여야를 떠나 대선 후보가 정해지면 당헌 당규에 따라 대선후보가 사실상 당무 우선권을 가지게 된다. 당 대표도 대선후보의 뜻에 따라 당무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윤 후보와 이 대표 및 김종인 총괄 선대위원장과 갈등은 차기 권력을 놓고 신구 기득권 세력 간의 권력 쟁탈전이라 보인다. 작금의 행태는 권모술수(權謀術數)가 판치는 혼돈의 시대 자신을 지키고 적을 제압하는 자만이 살아남는 형국을 연상케 한다. 권모술수의 핵심은 권력투쟁이다. 이에 윤 후보는 앞의 수레가 넘어져 엎어지는 것을 보고 뒤의 수레는 미리 경계한다는 복차지계(覆車之戒)를 뼛속 깊이 명심해야 한다. 조선 초기에 태종 이방원은 난세에 인재를 모아 정적을 없애고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며 권력을 잡은 후에는 불안한 왕권을 굳건히 다지기 위해 자신의 정적과 외척은 물론이고 아들인 세종의 장인까지 죽여 후환을 없앴다. 중화민국 장개석이 왜 망했나 생각해 볼 일이다. 나랏일을 하는 정치인은 권력 투쟁에 날이 새고, 국민은 방관하고 군대는 부패하여 미국이 준 무기를 적군에 팔아 밤이 새도록 술 먹고 마약을 한 결과다. 작금의 제1야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차기 권력을 향한 탐욕적 행태와 더불어 조직에 대한 헤게모니 장악을 둘러싼 치열한 권력 투쟁의 염치없는 싸움은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의 여망을 무참히 짓 밟는 죄악행위나 다름없다. 특히, 이 대표를 비롯한 김종인 위원장의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구태적 정치공학적 행태에 대해 주권자인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지 눈으로 차마 보지 못할 광경의 목불인견(目不忍見)이 아닐 수 없다. 이 대표와 김 위원장은 공공의 이익(국민)을 위한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이 절대 요구된다. 윤 후보 측과 연일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이 대표를 비롯한 김 위원장 등의 갈등 모습을 각종 언론 보도를 통해 지켜보고 있는 국민들은 정권교체를 방해하는 행위로밖에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윤 후보와 이 대표 및 김종인 위원장과의 헤게모니 전쟁이 극적으로 봉합되었지만 언제든 갈등이 재연될 수 있는 개연성은 다분해 보인다. 진정 국민을 위한 정치인이라면 충심, 진실, 겸손 등 진정성으로 국민을 위해 생각하고 진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이며 책무다. 이 대표와 김 위원장은 혹세무민(惑世誣民) 즉 국민들을 속여 정신을 홀리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정치인이란 오명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을 바르게 하는 정자정야(政者正也)의 정치인이 되길 충심으로 충고하고자 한다. 진정한 정치인이란 애민 정신(愛民 精神)과 함께 위민 정치(爲民政治)를 해야 한다. 문 정권의 폭정(暴政) 종식(終熄)을 통한 무너진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재조산하(再造山河)의 정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올바른 정치인은 국민만 바라보며 국민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불의한 정치인은 권력에 도취하여 내편 네편 편 가르기식 등 국민통합에 배치되는 분열의 정치를 통해 목적을 달성한다. 역사에서 배움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희망이 없다. 김병준 상임선대위원장과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 측과 충돌하며 당이 내홍에 휩싸일 경우 이준석 대표의 역할 범위 등을 두고도 갈등이 언제든 재연될 개연성이 있음을 윤석열 후보는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갈등이 재연될 시 윤석열 후보는 단호하고 흔들림 없는 결단력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성 명 서 [김덕근] 제20대 대통령 선거, 주권자인 국민의 현명한 선택이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있다. 2022년 3월 9일 실시되는 대선에서는 청렴결백하고 윤리의식이 겸비된 인물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야만 한다. 정치적 욕망을 위해 공공의 이익을 파괴하며 위선과 가면을 쓴 몰염치한 자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문재인 정권의 헌법 정신과 법치주의를 무시한 아전인수 통치행위에 권력을 통제해야 할 주권자(국민)의 수수방관의 책임이 매우 크다 할 것이다. 문 정권의 헌법적 가치와 법치 시스템 파괴 등 반국민적, 반민주적, 반인권적, 반국가적인 만행으로 인해 헌법상 국민의 자유권적 기본권이 심히 침해 당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헌법상의 국민 주권주의 원리를 망각한 정권의 행위에 대한 성찰과 함께 대오각성(大悟覺醒)하길 엄중히 촉구한다. 헌법에 명시된 국민주권주의 원리 아래서는 통치권자를 결정하는 것도 국민이고, 국가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도 국민에게 있다. 헌법의 제일 원칙은 바로 이 민주국가의 실현이다.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라고 처음에 밝힌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 국민이 모든 사안에서 언제나 직접 국가 의사를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국민이 선거에 의해 대표를 선출하고 그들에게 국가 의사를 결정할 것을 맡기는 것이다. 이에 국가의 최고 절대권을 가진 주권자 즉 국민이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는 가장 엄중한 절차다. 문재인 정권의 위정자들은 진영논리에 함몰되어 국민 편 가르기식 분열과 갈등 조장의 통치행위로 나라가 양분되는 위기에 처해있다. 대한민국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은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심화하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지금 우리는 정의롭고 공정한 기회가 보장되는 나라, 성숙한 나라,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희망의 공동체로 변화시키기 위한 엄숙한 역사적 소명을 완성할 수 있는 통치자가 절대 필요하다. 국민상대로 상습적으로 거짓말 하며 부도덕한 부정부패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우를 범한다 면 곧 대한민국의 희망이 실종될 것이고 미래세대에게는 불행이 시작될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안위존망(安危存亡)과 더불어 국민의 생명과 안전 및 행복추구권을 위해서라도 정치적 이념을 초월해 도덕성과 청렴결백한 후보를 대한민국의 제20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것이 주권자의 의무이며 또 책무를 다하는 것임을 분명히 직시해야 할 것이다. 2021.12.13. 바른태권도시민연합회 대표 국제스포츠인권위원회 위원장 김덕근
-
[기고] 생명에는 이념이 없다 [조성일](사단법인 공주참여자치시민연대 이사장 조성일) 쌀은 밥이다. 밥은 생명이다. 생명에는 이념이 없다. 국민의 힘 지지자든 민주당 지지자든 그 누구든 농부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농사를 짓는다. 대한민국에서 농부로 산다는 것은 운명이거나 출가를 결심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길이다. 경의를 표한다. 12월 10일 공주시의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전액 삭감된 2022년 푸드플랜 예산은 공주 소농들이 조금이나마 원기를 회복하고 마음 곳곳에 활력이 생겨 식량자급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는 목적에 쓰일 예산이다. 소농을 시장경쟁에 내맡겨두는 것은 시름시름 앓는 사람이 변변한 약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과 다름 아니다. 생산성이 떨어져 공주에서 생산되지 않는 작물을 공주에서 필요한 만큼 소농에게 소량 주문생산하면 지역 내 생산, 유통, 소비가 이루어지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각기 독자생존하는 개체에서 서로가 연결된 순환고리 안에서 사는 말 그대로 마을살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공주에 살고 있는 우리가 행복하고 따뜻해야 그 기운을 쫓아 사람이 깃든다, 소농의 문제는 단지 소농 개개인의 생존문제만이 아니다. 인구감소, 인구절벽의 시대에 공주가 사는 길이기도 하다. 따뜻한 기운은 수백 리 먼 곳까지 퍼진다. 산업단지 몇개 비할 바가 아니다. 무언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공주시의원들께 부탁드린다. 2022년 푸드플랜 사업이 활력있게 시작될 수 있도록 방안을 모색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푸드플랜 예산을 끊는 것은 마을에 들어가는 물줄기를 끊는 것이다. 푸드플랜 예산은 돈이 아니다. 물이요 생명이다. 두 손 모은다.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포토뉴스]2024충북 한우랑 브랜드랑 축제 이틀째 대성황... 제천의 축제다운 명품 축제로 만들겠다.
- 2제천 출신 이동욱 전 행안부 대변인, 민정비서관에 발탁
- 3[포토뉴스]2024충북 한우랑 브랜드랑 축제가 한창... 20~30% 저렴한 가격으로
- 4제천, 단양, 영월 시민연대를 김창규 충북 제천시장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집회시위 현수막’ 무단 철거 돼 논란
- 5제천시의회,‘제63회 충북도민체육대회’제천시 선수단 격려
- 6
- 7제천예술의전당, 홈페이지 운영 및 테스트 공연 관람권 판매 5월 10일 개시
- 8진천군, 제63회 충북도민체전 앞두고 꽃단장 마쳐
- 9K-네일의 모든 것, 대전-네일 페스타 개최
- 10세종시, 하천 점·사용료 25% 감면